무의미에 대한 사랑은 무의미의 축제를 관람하기 위한 입장권이다. 오직 무의미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축제의 엔딩을 엉덩이 붙이고 끝까지 볼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나머지는 축제의 중간에 두려움과 절망감에 떨며 공연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이다. 공연관람을 포기한 관객들을 기다리는 것은 자살이거나 일상으로의 복귀이다. 이제 생각해보니 사람에게 있어서 망각은 신의 선물이자 축복이다. 망각이 있기에 우리는 공연에 대한 충격적인 기억을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상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다. 망각의 도움을 받지 못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애도의 표시를.
이렇듯 인간 존재의 본질인 무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허무감, 고독감을 고려해 볼 때 거의 저주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는 독자에게 이런 무의미를 축복으로서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심지어 그는 책에서 삶의 무의미 앞에서 느끼는 부조리의 감정들은 깊게 다루지도 않는다. 그는 이미 무의미를 삶의 자명한 진실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스탈린에 관한 농담으로 승화시키기까지 한다. 너무나 당연한 나머지 아예 무의미를 유머로 만드는 그의 달관적 자세가 그의 작품에서 엿보인다.
의미부여는 의식의 필연적 결과이다. 코기토의 공식에 의해 나는 존재와 동시에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이를 염두에 두면 과연 무의미를 삶의 진실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뭘 의미할까? 아마 의미부여의 거부하는 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쳐피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무의미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의미부여하는 것과 무의미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무의미를 삶의 자명한 진실로서 받아들인 작가로선 전자의 경우는 자기기만의 행위일 것이다. 그렇다면 후자의 경우는 진실을 직시하는 용기의 행위이자 실존적 결단이다. 이는 이해관계를 떠나 삶에 대한 진정성을 요하는 것이다. 무의미를 사랑하고 심지어 그것을 유머로서 승화하는 것은 삶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무의미를 받아들이는 일은 삶을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인 것이다. 인류의 모든 위대한 작품들은 모두 백지의 캔버스 위에 그려졌듯이 모든 위대한 삶 또한 무의미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삶에 의미를 찾는 일에 열중한 나머지 무의미의 아름다움을 놓친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무의미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 가치의 발견은 세심한 관찰로부터 시작한다. 살아가면서 때때로 치고 올라오는 무의미에 대한 생각과 감정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면 무의미의 아름다움을 분명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반사적으로 겁먹고 달아가기 보다는 용기를 갖고 진실을 마주서보도록 하자. 여태까지 필사적으로 무의미가 나타날 때마다 의미로 덮어버리고자 노력했다면, 이제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고 싶다. 이 책을 다 읽고 애써 외면했던 삶의 진실을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천천히, 조급해하지 말고 무의미에 다가가 볼 것이다.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