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클리크는 누구인가
지난 휴가에 아우성 현역 둘을 만났다. 공연에서 한두 번 보긴 했지만 같이 밥 먹는 건 처음이었다. 그들을 만나기 전에 마음은 걱정과 설렘으로 가득 찼다. 15학번이 부담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초면이 안겨주는 두려움은 허상이었다. 우리들의 3시간은 몹시 업텐션으로 끝났다. 말을 너무 많이 해 전두엽이 붕 뜬 느낌이었다. 남자 친구는 형이 생각보다 너무 편하다고 했고, 여자 친구는 점심부터 너무 업텐션이었다며 술이 빨리 취할 것 같다며 걱정했다. 초면에, 그것도 점심에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고등학교 전교회장단과 대고련 부수석을 가끔 아련하게 회상한다. 옛날엔 후회하기도 했지만, 끝난 일을 어쩌겠는가. 나는 후배와의 관계에 위계질서를 중시했고, 선배들을 깍듯하게 대했다. 그랬기에 초면에 반말하는 후배를 이해하지 못했다. ‘위계질서 중시’ 관념은 사적인 친분을 막아 세웠다. 19살, 20살의 박준규는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위계질서는 곧 불편으로 이어졌다. 공적인 일을 하더라도 사적인 만남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사적인 만남을 하더라도 공적인 일 얘기를 자제했어야 했다.
한국 사회에서 윗사람과 만나는 일은 편치 않은 일이다. ‘윗사람’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위계질서 문화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높은 학번이나 많은 나이는 결코 위계질서에 적용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요소들을 위계질서 문화로 받아들인다. 한국 사회에서 위계질서 문화는 풀기 어려운 족쇄다. 그렇기에 초면에 나누는 대화에서 윗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 만약 아우성 현역들과 만난 자리에서 현안을 논의했다면, 첫인상이 어떻게 되었을까? 썩 유쾌하진 않다. 상담사처럼 현역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면 ‘공감 잘하는 선배’ 정도의 이미지는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쾌와 편안함은 그 이미지에 담기지 않는다. 사적인 만남을 공적인 얘기가 지배하면, 위계질서만 공고해질 뿐이다. 아예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결코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고, 분위기는 곧 편안해졌다.
“카클리크는 그 여자에게 아주 평범하고, 흥미롭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말을 드문드문 건넸는데, 그런 말은 똑똑한 대답도 재치도 요구하지 않으니까 더 기분 좋은 거였지. …”
“뛰어나 봐야 아무 쓸데없다는 거지, 그래, 알겠다.”
“쓸데없기만 한 게 아니야. 해롭다니까. 뛰어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고 할 때면 그 여자는 경쟁관계에 들어갔다고 느끼게 돼. 자기도 뛰어나야만 할 것 같거든. 그런데 그냥 보잘것없다는 건 여자를 자유롭게 해줘. 다르델로를 만나면 보잘것없는 인물이 아니라 나르키소스를 상대하게 될 거야” (24-25)
위계질서가 완전히 사라진 공간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지나치게 자기를 뽐내려는 시도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자신의 위치를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오로지 자신의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천지 차이의 대우를 받는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 과신에 빠지게 되고, 자기 과신은 물질적 정체성의 과다를 만들어 낸다. 소유를 과시하지 않으면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남을 불편하게 한다. 상대방은 자신의 물질적 정체성을 돌아보게 되고, 부족함에 집중하게 된다. 아울러 나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경쟁의식을 가지게 된다. 결국 쥘리와 하룻밤을 보낸 사람은 카클리크였다. 하지만 쥘리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자신과 밤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쥘리가 누구와 잤는지 모르니까 실패한 거라고? 천만에. 카클리크의 목적은 쥘리의 앎과 상관없이 달성되었다.
왜 무의미의 축제인가?
전쟁 같은 아주 심각한 시련에서도 무의미를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전쟁의 목적을 생각해보자. 조상들은 왜 전쟁을 했는가? 왜 그토록 무서운 살육을 저질렀는가? 전쟁의 시작과 끝에 남은 것은 결국 물질이었다. 힘의 관계를 정립하고, 이득을 취하려는 극단적 움직임이 전쟁 아니었는가? 그런데 전쟁은 끝났다. 이는 물질을 둘러싼 싸움의 상황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싸움에 참여하는 대상은 언제나 사람들이다. 개인 또는 집단을 둘러싼 물질적 환경이 사라지고 바라보게 되는 사람은 정말로 ‘무의미’하다. 어딜 보나 그런 사람들밖에 없으니 무의미한 사람들의 집단은 ‘일상’이다.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일상은 축제가 된다. 무의미의 축제는 곧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지구이다.
공교롭게도 스탈린이 등장한다. 스탈린의 모습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천사들’로 불리는 스탈린의 동지들은 그의 앞에만 서면 아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총 한 발을 쐈더니 스물네 마리 자고새가 모두 죽더라.’는 스탈린의 말에 동지들은 무조건 웃어야 했다. 스탈린은 불편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광신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스탈린이 믿고 있었던 ‘현상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주장은 『모비딕』의 에이해브 선장을 광신으로 만든 정말로 무의미한 의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알랭은 칼리닌과 스탈린의 관계를 제시하며, 칼리닌그라드라고 이름 지은 이유가 스탈린의 다정함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친구들은 칼리닌을 괴롭힌 줄로만 알았던 스탈린의 다정함을 생각하며, 이름이 수없이 바뀌었던 칼리닌그라드가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지를 확인할 때마다 인류의 연대감을 느낄 수 있겠다고 동조한다. 스탈린의 모습이 일관적이라면 ‘칼리닌그라드’는 인류애로 해석될 소지가 전혀 없다. 쿤데라는 독재자의 잔인함 속에서도 인류애를 발견하기 위해 ‘짓궂은 따듯함’을 내세운 듯하다.
아울러 책은 알랭과 어머니가 화해하는 과정으로도 인류애를 드러낸다. 알랭의 어머니는 임신 중에 자살을 시도했지만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그녀에게 진정한 도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알랭을 출산한 뒤 자식의 곁을 떠난다. 자식 입장에선 충분히 어머니를 원망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알랭은 자신을 보살펴 준 아버지 대신 어머니의 사진을 집에 걸어 놓는다. 알랭은 ‘어머니’로 떠올리는 무언가와 대화하여 이해하려고 할 뿐이다. 알랭은 내면에서 원망을 없애고 어머니를 감싸려고 노력한다. 단순히 어머니가 그리워서 행동을 이해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스탈린의 다정함, 알랭의 자기 주도 화해는 모두 사랑으로 묶인다. 무의미의 축제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연인을 향한 열렬한 감정과는 분명 다른 구석이 있다. 평생 같이 함께 할 친구를 오랜만에 보았을 때 느끼는 벅참, 진정한 우정, 설명할 수 없는 믿음과 유대감과 비슷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쿤데라의 주장은 지난 칼럼인 ‘존중 되살리기’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존중 되살리기’는 공감 요구, 노력으로 이뤄지는 사랑의 불가능을 얘기한다. 공감과 사랑은 우러러 나와야 한다. 사랑하는 법, 즉 기술만 배워서는 무의미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진정으로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배움은 생각의 도구를 늘려 주는 역할을 한다. 무의미를 사랑하는 기술만 연마해선 답이 없다. 하지만 ‘무의미를 한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배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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