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최첨단 기술들이 지배하는 21세기가 되면서 인간의 삶은 편리해진 반면, 그에 따른 인간성의 말살과
그에 따라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하고 헤메는 인간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이방인’들의 모습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70년도 훨씬 전에 출간된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도 일찍이 잘 드러난 바 있다. 이 책은 앞서 말한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그대로 표방해 놓을 정도로 그 시대 만연했던 인간들의 모습이며, 또 다시 50년을 거슬러가 1890년대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 ‘무희’에도 등장한다. 자아를
찾지 못하고 휩쓸리는 인간의 모습은 동서양과 시대를 불문하고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상이라는 점이 명백해지는 부분이다.
사실 책에 등장하는 ‘도요타로’라는 인물은 그 객관적인 능력만을 놓고 보면 더할 나위 없는
그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다. 그는 채 20세기도 되지 않은
시대적인 한계와 동양인이라는 인종적인 한계를 동시에 뛰어넘어 다양한 능력, 특히 독일어, 프랑스어 등을 구사하는 특출난 어학적 능력을 발휘하여 대신에게 신임을 얻는다.
그러나 이처럼 책 곳곳에서 그의 학구적 면모와 높은 학식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게끔 하는 다양한 서술들을 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독자인 나로서는 그것이 도요타로를 ‘위대하게끔’ 보여주는 장치는 아니라고 느끼게 하였다. 아니, 반대로 그의 인간미를 더더욱 덮어버리는 의도적 서술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 느껴졌던 그에 대한 인상은 근대라는 시대에 의해 ‘만들어진’ 인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어머니나 관장에 의해 수동적으로 ‘만들어졌다’는 표현을 할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던 그이지만, 그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도요타로의 연인인 앨리스는 작품 속에서
단순히 그의 연인이라는 단순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요타로의 기존 가치관을 뒤엎는 일종의
촉발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독일에 유학을 오면서 서서히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는 도요타로에게
불을 지핀 것이다. 변화는 분명했고, 관성 역시 극심했다. 인간 도요타로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학문’이라는 것이 앨리스를 만난 후로 퇴색했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고백한다. 기존 도요타로의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변화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다시 말해 앨리스를 만나 살아가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만족, 곧 그로 인해 변화한 자신에 대한 만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앨리스가 다른 자아를 찾게 하는 ‘촉발제’라면, 친구 아이자와는 ‘관성’이다. 더불어 이 아이자와라는 인물은 소설 전체를 통틀어 도요타로의
‘나약함’이라는 인간적인 단점을 매번 가려주는 일종의 방어막, 그리고 좋은 핑계거리가 되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도요타로는 결국 마지막에 앨리스를 저버림과 동시에
완전한 정신적 성숙을 이룰 일생일대의 기회 또한 놓쳤다고 볼 수 있다. 사랑했던 사람과 아이를 버리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이방인’에서와 같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비춰지지 않아 비교적 온화하게 보여질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방인’에서의 죽음보다 더 끔찍한 상실이다. 또한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일에 대해 친구 아이자와를 조금 미워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라는 그의 담백한
서술은 그 어떤 분노의 표현보다도 소름끼치는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정열이 뜨거울수록 마지막에 남는
냉소는 그만큼 차가운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