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랑시에르의 문학에 대한 여러 논문들을 묶어서 출판한 책이다. 문학의 정치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어떻게 시, 소설, 희곡, 정신분석학, 그리고 역사학이 정치를 내포한 문학의 형식을 구축하는지 살펴본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여태 읽었던 책 중 제일 어려웠지만, 그만큼 문학이 어떻게 세계와 관계를 맺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내가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여태껏 궁금했던 의문점들이 대략적으로나마 해결되었다. 주의할 것은 문학과 정치가 아닌 문학의 정치라는 것. 따라서 ‘문학이 어떻게 정치에 영향을 끼치냐?’가 아니라, 문학이 어떻게 정치적 형식을 실천하고 내포하는지를 보여준다.
랑시에르는 우선 기존의 문학 질서가 기득권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연극의 주인공이 되고 대상이 되는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문학은 그들에게 지배받았던 시기를 지나, 플로베르가 사실주의의 문체를 발견한 이후에 민주적인 성격을 획득했다.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는 것이 문학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플로베르는 그만의 문체로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사물들과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줄거리와 행동하는 인물들이 나타내던 의미와 의지의 세계의 질서를 파기하고 말 없는 사물들을 묘사한다. 그간 존재하던 의미들은 사라지고 세계는 동등한 특질을 갖게 된다. 따라서 당대의 비평가들은 그의 소설이 민주적이기 때문에 비판한다.
이러한 견해차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오해는 모호한 낱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진부한 것들에서 발생한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오해란 기호의 해석의 차가 아닌 사물들의 계산 값의 차라고 할 수 있다. 비평가들에게 쓸모없어 보이는 주변적 사물들이 플로베르에겐 다른 것들과 동등하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오해는 문학의 정치적 계산차를 나타내는 상태이다.
보르헤스는 이런 플로베르의 문체를 비판한다. 그는 너무 과장해서 사물들을 표현한다. 동시에 그의 문체는 너무 절대적이므로 그의 작가의 권위는 높아진다. 따라서 플로베르는 어느새 작가의 권위를 앞세워서 삶과 말의 연속성을 파기한다. 그는 책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보르헤스가 택한 설화적 방식은 작가를 비인격적으로 만들고, 액자형식을 취함으로서 독자와 작가, 화자와 등장인물의 위계를 전복시킨다. 이는 문학이 허구와 있음직한 일을 분리함으로써 발명되기 이전의 글쓰기 방식이다. 설화 속에선 이야기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저자는 사라진다. 그의 글쓰기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가 삶과 연속되는 꿈을 꾸게 된다. 그러나 그의 글쓰기 또한 문학의 발명 이후에 생긴 낱말과 책으로 한정되는 근본적 조건을 벗어나긴 힘들었다.
이어서 그가 말라르메의 시를 파악한 논문을 본다면, 시가 어떻게 문학의 발명 이후에도 정치적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알 수 있다. 시인은 침입자로 노동자들의 세계에 들어간다. 침입은 노동자가 처한 위계들을 파괴한다. 그의 시가 묘사하는 침입에 의한 갈등과 대면은 노동자들을 시에 이르는 상황 속으로 유도한다. 그러나 시가 책으로 묶여 나올 때 노동자들은 박제 된 채 다시 말을 잃는다.
문학은 역사학에도 영향을 끼쳐 전기의 양식을 발명한다. 표본성에 대한 개념의 차는 대상이 체험한 삶과 역사적 사료 사이의 관계를 저울질 한다. 주관적 체험과 객관적 자료가 융해되어 하나의 모델을 형성한다면, 그것들은 삶의 총체적인 역사성을 획득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는 역사가들에 의해 대중으로 뭉뚱그려 묘사된 그 모든 사람들이 말을 잃지 않았다는 것, 그들의 말은 다른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무언가를 위한 증언이 아닌 그 스스로를 위한 삶의 체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제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허구를 사실에 끼워 넣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기적 양식의 역사성은 다른 모두의 글쓰기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그 자체로 삶의 체험으로 받아들일 때만 민주적이다.
내용에서 보다시피 랑시에르의 문학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므로 문학의 모든 형식은 존재하는 모든 위계를 철폐하고, 동등한 시각에서 보여야한다. 이것이 랑시에르가 감정의 분할을 통해 새로운 미학 체계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의 정치를 발견하는 것이 실제 정치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이다. 그에겐 이미 문학 속에 내재된 민주주의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도통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이 아무리 민주적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반대로 문학을 삶의 체험이라는 큰 범위로 잡음으로써 체험의 개별성에 관하여 무책임하게 처리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