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민주주의
1830년대 프랑스 판사였던 토크빌이 미국 교도소 시찰 목적으로 미국을 방문해, 당시 미국의 25개 주 / 12,000Km를 여행하고 쓴 답사기가 바로 ‘미국의 민주주의’이다. 저자는 존 애덤스 제 2대 미국 대통령부터 인디언 추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국인들을 접했고, 제도가 자리잡아가는 미국의 모습을 목격한다. 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빠른 속도로 발전해가는 미국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런 미국의 모습을 바라본 유럽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어 재미있는 책이었다.
토크빌은 미국을 ‘가장 평범한 사람이, 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마주치면 악수를 청할 수 있는 나라’, ‘오늘 가난한 사람도 내일 부자가 될 수 있고 정치 의사결정에 당당히 투표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나라’라고 요약했다. 당시 미국은 제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의 집권시기로, ‘정당’의 개념이 엘리트 중심의 소규모 조직에서 시, 군, 주 및 전국 수준에서 당원을 선출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변화하는 중이었다. 소위 ‘풀뿌리 민주주의’ 기반 공화정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과정을 목도한 셈이다. 이 책을 쓴 토크빌이 프랑스 귀족 가문출신으로 미국을 여행올 때 이미 25세에 프랑스 판사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눈에 ‘보통 사람들’이 정치 프로세스에 참여하는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토크빌은 신생 미국이 ‘보통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화정 대의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었던 조건으로 ‘자연환경’, ‘법률’, ‘관습’ 세 가지를 꼽았다. ‘자연환경’이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국가가 없기 때문에 국가 단위의 전쟁이 없고, 전쟁으로 인한 재정위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단기간에 권력이나 부의 집중화를 초래하는 국가 단위의 움직임이 발생할 소지가 적었다. ‘법률’이란 강력한 연방을 구축하고 연방의 권위를 인정하되, 도시 단위의 지방자치도 보장하는 정치제도를 의미하며, 넓은 범위로는 ‘국가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국민이 태어나 살아간다’에서 출발한 법률이 아니라 ‘국민이 국가보다 먼저 존재했고, 필요에 의해 합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국가’가 제정한 법률이라는 차이도 포함한다. ‘관습’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하는 사회적 위치 - 귀족 / 하층민 같은 - 등이 존재하지 않았고, 초기 이민자들은 교육을 통해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 개념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관습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번영 초창기만을 눈으로 확인한 토크빌이지만, 토크빌은 이 책에서 미국의 미래를 상당히 정확히 예견했다. 토크빌은 유럽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정치체제,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미국의 공화제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로의 전환은 필연이고, 유럽 역시도 법 앞의 평등, 재산과 지식의 평등화로 나아갈 것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공화제 민주주의 제도의 정착이 가장 용이한 미국이 언젠가는 지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역사적 사실을 예측해서 들어맞은 것도 몇 가지 있다. 예컨대 ‘노예 때문에 게으름에 빠진 남부 백인들은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강하다. 미국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도화선 중 하나는 노예제다.’고 언급했고, 실제로 미국은 노예제 문제로 남북전쟁을 일으켰다. 미국과 러시아의 충돌 가능성도 예견했는데, ‘아메리카인의 주요 수단은 자유, 러시아는 예속이다’를 근거로 들었다. 물론 예속의 러시아가 소련이 되어 미국과 맞대응할 만큼 강대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예측까지는 들어 있지 않지만, 미국과 대립할 만한 국가로 러시아를 특정해 언급했다는 것 자체도 상당한 통찰력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과연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큼 대단한 서적인지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처음으로 제시한 책도 아니고, 유럽에 민주주의를 처음으로 소개한 책도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던 사회계약론, 사회주의의 사상적 기반인 유물론을 담은 자본론, 혼란한 시기 통치자의 통치방법을 서술한 리바이어던 등 서양 근대의 고전으로 인정받는 서적들은 역사에 확실한 족적이 있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서 느낀 ‘미국의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는 ‘신생 국가인 미국을 분석한 외부인의 시각 중 미국을 호의적으로 평가했으며 예측이 맞아떨어진 책’에 더 가깝다. 유럽이나 아시아의 국가에 비하면 미국은 역사가 오래지 않은 국가다. 그러다보니 미국에 관련된 저술이 여타 국가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는데, 미국보다 역사가 오래된 유럽에서 미국을 호의적으로 분석하고 좋게 예측한 서적이라면 미국의 입장에서는 가치있는 서적일 것이다. 즉,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고전’으로 평가받을 만한 서적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