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은 달리는 버스 안에 몸을 맡긴 채 운명이라는 이름의 종점까지 그저 앉아서 하염없이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본다. 나 또한 그랬다. 나는 내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으나, 이 삶이 행복해질 수 있을지, 혹은 행복해지기 위하여 나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 본적이 없다. 이 책은 심리학자 아들러의 철학을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를 통하여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써져 있다. 아들러는 트라우마를 부정하고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나는 트라우마 존재에 대한 부정에 초점을 맞추어 내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한다. 불행했던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나와 공감할 수 있는 아픔을 가진 10대, 20대 친구들이 잘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트라우마란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는 기억, 곧 사람들이 경험하는 정신적인 상처를 의미한다. 원인론에 입각한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들이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과거의 특정한 일에 원인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철학자는 그것은 그저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잘못이 없다며 위로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 즉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결혼도 하기 싫고 아기도 낳기 싫어.” 내가 친구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평범한 여성이라면 자연스럽게 연애 끝에 결혼을 꿈꾸고, 결혼을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아기를 갖는다. 왜 나는 내가 말하는 평범한 여성에 속하지 못 할까? 나는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트라우마를 갖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내가 8살 때 친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친할머니께서 어머니의 빈 자리를 넘치도록 채워주셨다. 그리고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께서 지금의 어머니와 재혼을 하셨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재혼하시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늘나라에서 어머니가 다 지켜보고 계실 텐데, 분명 슬퍼하실거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결혼식을 앞두고 집에 머물며 함께 지냈던 친할머니가 떠나가던 날, 나는 엉엉 소리를 내며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울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새어머니와 금방 가까워졌다. 그러나 2년 정도 지났을 쯤,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외줄타기를 하는 것 마냥 아슬아슬해졌다. 어린 내가 방에서 대화 소리를 다 듣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 분은 큰 소리로 싸우셨다. 결국 어머니는 이혼해줄 것을 요구하며 집을 나가셨다. 억울했다. 어머니란 존재에게 두 번 버림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 날 역시 할머니가 떠나간 날처럼 나는 또 가족들 앞에서 엉엉 울었다. 이미 다 커버린 오빠들과 달리 겨우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간절히 필요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 따로 사셨지만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수능을 볼 때까지 친자식만큼 나를 사랑해주시고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의 갈등은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계속 지속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거실에서 언성을 높이며 싸울 때마다 나는 지금 내 귀가 먹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불행한 삶이 주어졌을까. 왜 나는 다른 친구들과 같은 평범한 가정 속에 태어나지 않은 것일까?’ 아버지가 미웠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탓인 것만 같았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내게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자기소개서마다 등장하는 전형적인 1번 문제가 반가울 리 없었다. 그들은 항상 내가 자라온 가정 환경을 첫 번째로 물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다. 처음에 나는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럴싸한 역경 극복 스토리를 지어낸 것이다. 내 가정 환경을 물어보는 질문이 필수 질문이 아니었던 어느 대학의 자기소개서에 내 모든 시간을 투자하고 그 대학에 합격했다. 결국 나는 괴물같이 느껴지는 그 질문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철저하게 원인론에 입각한 가치관을 지니며 살았다. 아들러가 얘기하는 목적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핑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미래에 결혼 생활에 실패하고 아이를 잘 키우지 못 했을 때, 나는 내 과거 가정사를 들먹이며 말할 것이다. ‘나는 이랬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어. 이건 내 탓이 아니라 내가 과거 경험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지.’ 라고 말이다. 나는 마침내 나의 미련함을 깨달았다. 내가 내 과거에 부여한 의미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그 몇 년간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살게 했다. 나는 마침내 내 사고를 180도 뒤집을 수 있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거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로 다짐했다. ‘나는 예쁜 가정을 꾸려야지.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들려주어야지. 내 과거를 반복하지 말아야지’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은 달리는 버스 안에 몸을 맡긴 채 운명이라는 이름의 종점까지 그저 앉아서 하염없이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본다. 나 또한 그랬다. 이제 이 푸념은 과거형이 되었다. 나는 내가 정해둔 불행한 운명이라는 종점에 도착하기 전에 이 버스에서 하차하기로 했다. 내가 새롭게 정한 행복한 미래를 향한 다른 버스로 갈아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