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의 잎과 수저의 대물림
시급 3500원의 가냘프신 아버지는 자본주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을 힘들어하셨다. 그때 학생인 ‘나’까지도 일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께서 입원하신 적이 있으니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큰 부담이 되셨을 것이다. 병원에서 본 그 잿빛 눈동자는 그 고통의 여파인지, 아버지가 기린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아버지는 분명히 처음부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시급 3500원을 받으며 일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어쩌겠는가.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또한 ‘아버지’라는 역할을 달고 가정을 버릴 수 없다. 아버지도 사회적 계급에 맞춘 산수대로 사신다고 힘드셨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처음에는 목이 짧았던 기린은 높은 곳의 잎을 따먹으려고 하다 보니 목이 길어졌다. 고개를 숙여서 낮은 곳의 잎을 따먹으면 적이 오는 것을 빨리 눈치 챌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고 높은 곳의 잎을 따먹는다는 것은,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 맞춰 살아간다는 것이다.
기린은 먼 시절부터 현실에 적응하려고 애쓴 것이다. 적을 잘 피하려고, 죽지 않으려고, 자신의 모습을 바꾼 것이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기린 새끼가 태어난 지 몇 분 만에 달릴 수 있는 것처럼,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셨다. 성격이 여려서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지만 가족을 위해 그 고통을 다 견뎌내고 일을 하셨다. 돈을 아끼려고 도시락을 싸가셨고, 을씨년스러운 사무실이든 어디든 일거리를 찾아 백방으로 전전하셨다.
그러나 당신이 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는 기린이 얇고 호리호리한 다리에, 그 긴 목을 힘겹게 가누는 것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의 뒷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사회를 뛰쳐나가 동물이 된 아버지와는 달리, ‘나’는 힘들어도 잡초처럼 꿋꿋하게 살아간다. 2000년대에 고등학생이었으니, 2016년엔 아마 30살 초중반일 것이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일단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자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막연함으로만 살아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뒤늦게 2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간단한 기술을 배운 ‘나’는, 작은 상사에서 일을 본다. 그럭저럭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본격적으로 사회에 발을 딛고 나서야 산수의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지 알게 되지만, ‘나’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의 폭은 좁기만 하다. 상고, 2년제 대학, 전문화되지 않은 기술. 수학의 삶에서는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 하루하루 산수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이라는 연산의 답을 구하는 과정에 있던 ‘나’는 수학의 삶을 잠깐 동경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등학생 시절부터 일을 할 정도로 현실적이기 때문에, 이루지 못할 꿈은 일찍 포기하는 편을 선택한다. ‘나’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느새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한다.
2025년, 아이가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었다. 비슷한 종류의 여러 직장들을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중이다. 아이는 자신을 똑 닮아서 현실감각이 뛰어나다. 철이 들기도 전에 집안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최대한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안쓰러움과 미안함을 느낀다.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든다. 자신의 아버지도 자기를 보면서 이런 감정이 들었을까? ‘나’는 자꾸만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한다.
요새 아이가 어디서 뭘 주워들었는지, 자꾸 ‘수저’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 아이가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이다. 직설적으로 왜 우리 집은 흙수저밖에 못 되냐고 물어온다. ‘나’는 다시 할 말이 없다.
‘나’는 45세 정도만 되면 칼같이‘명예퇴직’을 시키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 점심시간이 되면 다들 사내식당으로 간다. 하지만 연애부터 취업까지 모든 게 힘든 요새 젊은이들 사이에, 40대 늙은이가 끼여서 먹기 부담스럽고 눈치 보인다. 그래서 ‘나’는 점심은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해결한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간 편의점에는 ‘나’의 아이가 편의점 조끼를 입고, 큰 소리로 인사하다 말고 입을 살짝 벌린 채 나를 둥그런 눈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아이의 눈빛에 어렴풋이 회색빛이 돈다. 왜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흙수저인가.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