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꿈을 꾸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검은 머리의 발랄한 아가씨 ‘그녀’와 그런 그녀를 짝사랑하며 쫓아다니는 선배(‘나’) 사이에 일어난 일을 1년 사계절을 배경으로 허구와 사실을 절묘하게 교차시킨 소설이다.
모리미 도미히코와 그 소재에 대하여
이 소설에서 특별한 사건들은 보통 밤에 일어난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보다 늦게 쓰인 다른 소설 『야행』에서도 그렇고 모리미 도미히코의 ‘밤’에 대한 사랑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비록 이 소설에서는 시간적 배경이 항상 밤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두 번이나 그의 소설에 있어서 ‘밤’을 제목에 넣었다는 점, 이 소설의 시작을 밤에 전등을 잔뜩 달고 달려오는 3층 전차의 등장으로 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모리미 도미히코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에서 뽑아낼 수 있는 심상에서 최대한 판타지를 결합한다. 봄에는 술과 꽃이 만연한 춘야(春夜)에서, 여름에는 그 찌는 듯한 무더위에서, 가을에는 한창 대학 축제시기에 볼 수 있는 낭만에서, 겨울에는 감기 유행으로 사람이 다니지 않는 거리에서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어 사건이 일어난다. 그 외에도 사과나 달마오뚝이와 같이 작고 둥글고 붉은 소재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뚜렷한 심상을 전달한다. ‘매직 리얼리즘’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모리미 도미히코 특유의 개성넘치는 기법으로 그려진 장면들을 보면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읽기만 해도 생생한 묘사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만큼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였으며, 만화 역시 정발되었다고 한다.
모리미 도미히코와 일본 문호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배경 중 하나인 헌책방에서는 여러 문호들이 언급되는데, 특히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애정을 발견할 수 있어 반가웠다. ‘나’는 쨍쨍한 무더위의 여름날 헌책방에서 특별히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중 하나인 ‘옛날 이야기’를 언급하며 관련된 추억을 떠올린다. 도호쿠 지방을 여행하는 도중 다자이의 생가 문학관에서 산 색종이에 ‘반한 게 잘못인가1)’라는 구절을 썼다는 기억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옛날 이야기』를 읽지 않은 독자는 갑자기 이게 무슨 구절인지 생뚱맞게 느낄 수 있겠지만, 이 구절은 젊고 예쁜 토끼를 짝사랑하던 늙고 추레한 너구리가 된통 골탕을 먹게 되자 하는 말이다. 마치 ‘나’가 검은 머리 아가씨와 자신의 관계를 시무룩하게 겹쳐보는 것 같은 느낌을 연출하는 것 같아 작가의 의도적인 센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애정은 그의 다른 저서 『달려라 메로스』에서도 잘 나타난다. 제목부터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제목을 따온 그 소설은 내용도 원작을 리메이크한 것으로, 이 외에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이나 사카구치 안고의 『벚나무 숲 만발한 벚꽃 아래』 등 역시 포함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달려라 메로스’를 택하여 제목으로 한 것은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그의 편애를 엿볼 수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모리미 도미히코는 요괴인지 사람인지 헷갈리는 괴이쩍은 인물들과 교토를 배경으로 실존하는 장소들에 상상력을 덧붙여 만들어낸 공간들로 한 편의 꿈같은 글을 써냈다. 흥미롭게도 주된 두 인물인 ‘나’와 검은 머리 아가씨는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리지도 않는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개성은 주인공들마저 몽환적인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둠으로써 완성된 것이다.
1) 모리미 도미히코, 서혜영,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파주: 작가정신, 2008, 12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