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로빈슨 크루소>를 각색한 소설이다. 주인공의 이름도 로빈슨 크루소이고, 제목인 방드르디는 프랑스어로 금요일이란 뜻으로, 원전에선 로빈슨 크루소의 하인으로 등장하는 흑인을 프랑스어로 이름만 바꾼 것이다. 제목에서 알다시피 작품의 중심은 로빈슨에서 방드르디로 옮겨져, 태평양의 끝에서 찾게 되는 원시적이지만, 순수하고 사랑이 넘치는 세계에 대해 그리고 있다.
로빈슨은 20대 초반에 버지니아 호에 오르게 되고 항해를 시작하지만, 곧 그 배는 어느 무인도에서 좌초하게 된다. 유일한 생존자는 로빈슨이므로 그는 고독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처음에는 그에게 섬은 그저 계발해야할 황무지로 비춰졌다. 세상으로부터의 유배에 따른 절망의 시간 뒤에 그는 스스로를 총독의 자리에 올리고, 집무실을 만들고, 곡식을 거두는 등, 오로지 섬을 계발하는 데에만 힘썼다.
그 후에는 스스로 어머니 대지라고 부르는 시기가 찾아온다. 그는 섬에 희망이라는 뜻을 가진 스페란챠라는 이름을 붙여두고, 섬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살아간다. 섬의 관계가 바뀐 이유는, 그가 더 이상 타인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관계는 섬과의 관계 혹은 자신과의 관계를 통한 섬과의 합일이었다. 그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한 상대적인 시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가 고독과 혼란에 빠져들 무렵, 그는 섬의 깊은 곳에 있는 골짜기를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여자의 자궁과 같은 어느 굴에 빠지게 된다. 그는 섬이 가진 성을 탐한 것이다.
그 이후에는 애인으로서의 대지시기에 접어든다. 그는 섬의 심장부처럼 보이는 굴에는 가지 않았지만, 골짜기에 가서 성행위를 하고, 그 곳에는 뿌리가 사람을 닮은 만드라고라가 피어난다. 성이란 원초적 욕망이지만, 그 안에는 세대를 담고 있고, 결과적으로 개체의 죽음을 암시한다. 로빈슨은 그런 한계를 깨닫지만, 동시에 새로운 안정을 느끼게 된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이 이미 많은 시간을 고독하게 보낸 후에 등장한다. 부족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드르디를 구해 준 뒤에 둘은 섬에서 동거를 하게 되지만, 그들의 관계는 총독과 노예의 관계이다. 그는 자유로운 방드르디를 구속하고 박해한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언제나 자유롭길 원하고 로빈슨의 눈을 피해 자신의 호기심과 욕망을 충족시킨다. 골짜기를 찾아가 섬과의 성행위를 하는 것부터, 로빈슨의 보석들을 장난삼아 버리고, 고대해오던 논을 망치는 것에 더해, 로빈슨이 두 달에 한 번씩 아껴 피던 담배를 축낸다. 게다가 담뱃불을 관리하지 않는 바람에 불이 화약에 옮겨 붙어서 로빈슨이 쌓아온 업적이 한 순간에 날아가게 만든다.
로빈슨은 허무함 속에서 그가 섬의 새로운 모습들을 점차 알아갔듯이, 방드르디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노예와 총독의 관계가 아닌 인간의 원초적 모습으로서의 방드르디이다. 그는 이제는 서양식의 습관들을 완전히 버리고, 방드르디와 비슷해져간다. 그들의 시간은 더 이상 역사를 가늠할 수 없고, 그들의 관계는 서로를 흉내내는 놀이를 통해 회복된다. 이러한 행위는 그들의 모습을 쌍둥이처럼 동일하게 만든다. 로빈슨은 태양을 보면서 시간의 영원함을 느끼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역사와 관계에서 벗어난 순수하고 사랑이 넘치는 시간 속에 빠져든다. 그 사랑은 태양의 근원적인 에너지, 세계에 대한 사랑이다.
곧 어느 상선이 스페란챠를 우연히 지나게 되고, 로빈슨은 그들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게 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영원히 젊을 사람처럼 느껴졌던 로빈슨은 그들의 방문으로 30년의 세월이 한 순간에 어깨 위에 올라탄 것만 같다. 세상의 끝, 어느 영역에도 속하지 않던 스페란챠의 시간은 그를 근원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눈에 서양의 문물은 허위적이고, 타인과의 관계는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에게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실 되지 못하다. 결국 그는 다시 서구로 돌아가길 거부하지만, 방드르디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떠난다. 다시 고독해진 로빈슨은 배에 타고 있던 어린 아이가 섬에 숨어든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목요일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야기는 물론 서양인의 시각에서 쓰였다. 로빈슨이 아무리 방드르디의 삶과 동화되고, 원시적인 삶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서양인의 입장에서 원시적인 부족들이 갖는 순수성을 이상적으로 묘사할 뿐이다. 이 주제는 내가 느끼기엔 서양인들이 갖는 오래된 문명에 대한 식상함과 새로운 생활에 대한 낭만을 어느 정도 뒤섞은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방드르디의 삶을 이상적으로 보아도 막상 방드르디의 입장에서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애초에 자신을 방드르디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명명은 백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방드르디의 삶에 대해 생각해볼 때, 그는 서양 문물에 의해 파괴당한 다른 문명이라고 볼 수 도 있을 것 같다. 서구에서 그의 미래가 노예에 그칠 것임에도, 그는 문명이 가져온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로빈슨의 영향을 받아 서구 문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그저 자유를 꿈꾸는 인물이었고, 바람을 다스리는 범선이 그이 이상에 맞았을 뿐이다. 그의 이상은 로빈슨과는 반대로 서구의 기술로 향한 것이다. 어쩌면 원초적 삶에 대한 추구는 서구적인 ‘관계의 삶’을 겪지 않고는 완성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작품의 마지막에 서구에서 온 어린아이가 새로운 스페란챠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끝마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소설이 아무리 이상적이고 순수한 삶에 대해 얘기하더라도, 이러한 생각이 서구인의 문명을 앞세운 폭력적인 시각의 하나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원시인에게,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둘 밖에 없는 섬에서 어째서 이름이 필요 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