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아들인 그레고르. 그는 자다가 일어났더니 벌레로 변신해 있었다. 변신! 그는 외판 판매원으로 그날 아침에도 새벽 기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벌레로 변신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벌레가 아닌 해충인 모습이었다. 회사에 나가지 못하는 바람에 지배원이 그레고르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그레고르에게 방 문을 열으라고 윽박질렀다. 그래서 그와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변신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가족들은 처음 그레고르의 모습을 볼 때는 경악한다. 그 다음 그레고르의 방을 치워주거나 밥을 챙겨주는 등 그레고르를 존중해준다. 비록 흉측하고 지저분한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지만.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레고르를 더 이상 한 가정의 일원이 아니라 말 그대로 벌레, 짐짝 취급한다. 없어져줘야 할 존재로, 가족의 미래, 행복을 위해서는 그는 있어서는 안 된다. 말도 통하지 않는다. 방 한 칸을 차지한채로 어지럽히기만 한다. 이런 존재를 점점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결국 그레고르는 죽는다. 죽는 그 순간까지 그레고르는 존중받지 못 한다. 가족들과 하녀는 그가 죽어서 좋은 눈치다. 그레고르의 흉측함 때문에 세 들어살던 세 명의 남자가 도망가고, 도저히 처치 곤란이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죽음으로 새 출발을 하러 떠난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 중에 ‘변신’이라는 노래가 있다. ‘선명하게 변해버린 처음 본 이모습들이 눈부시게 다가와서…내게 누구냐고 물어보네’라는 가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레고르는 자기 자신의 의지로 모습이 바뀐 것이 아니다. 가족들은 그레고르에게 다가가 그가 누구인지 마음 속으로 정의를 바꿔버린다. 가족을 위해서 일했던 그레고르는 그 역할이 없어지자 마자(변신하자 마자) 가족들에게 버림받아버린다. 이 책의 저자인 프렌츠 카프카는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직을 정확히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토마스 만) 카프카는 단편 소설의 형식을 빌려 우울한 사회에서의 소시민을 그려냈다. 빚도 있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 되지도 않고 그냥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 살아가는데 급급하고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빚이 있지만 미래를 위해 조금씩 이라도 저축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 이 소설은 그런 사람들을 그려낸 것이라고 느껴졌다. 책의 분위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벌레로 변한, 해충으로 변신한 주인공의 이야기가 해학적으로 그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일 당장 내가 일어났을 때 해충으로 변해있으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나는 혼자 방을 쓰고 있어서 그레고르처럼 금방 해충으로 변한 모습을 들키지는 않을 것이다. 수업을 못 갔을 때 걱정이 된 친구들이 아마 전화를 해볼 것이고, 팔, 다리마저 벌레의 다리로 변해버려 전화를 못 받으면 내 방으로 오겠지. 그리고 아마도 나를 죽여버릴 것이다. 해충이 나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 할 것 같다. 너무나도 큰 해충으로 변해버려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고 보듬어주지 않을 것이다. 외로울 것 같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해버린 그레고르가 외형만 사람이었지 실상은 해충인 존재였던 것이다. 결국 죽어버리긴 했지만 그레고르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