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케스트라든 연습이나 공연을 시작하기 전 기준음을 조율한다. 나는 얼마 전 뉴스에서 이 기준음의 주파수가 현대로 올수록 높아져 왔다는 기사를 접했다. 세상이 더 빠르고 긴장되게 흐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들으면서 안정을 취한다는 클래식까지 그런 세상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끔찍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매일 새롭고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원하며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는 과연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있는 것일까? ‘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매일 출장만 다니는 세일즈맨 윌리의 가족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고, ‘변신’에 나온 그레고르의 가족은 그레고르가 더 이상 가장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벌레가 되자 그를 외면하고 소외시킨다.
김기택 시인의 시 ‘사무원’에는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 윌리처럼 일을 위한 일을 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시인은 그를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손익관리대장경’과 ‘자금수지심경’을 외우고 상사에게 108배를 올리며 수행하는 스님처럼 묘사하고, 그의 배가 점점 부풀고 팔다리가 가늘어지며 얼굴이 창백해졌다고 말한다. 마치 김동인의 ‘무지개’에 등장하는 소년처럼, 그는 오직 추상적인 목표만을 위해 달려온 것이다. 이들은 과연 ‘나는 일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형태의 실존 외에 자신들의 실존에 대해 인식하고 있을까? 자본주의의 경제성이 없다면 외면하는 법칙의 희생자가 되고 나서야 윌리는 자신의 삶에서 있었던 선택의 순간들을 되돌아보고 그가 내면에 가지고 있던 가슴 시린 외로움을 발견하고 무지개를 쫒던 소년은 무지개를 영원히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자신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얼마 전 지인에게, 대기업이 몰려드는 젊고 뛰어난 인재들 때문에 사원들뿐만 아니라 간부들까지 모두 정년보다 빨리 해고시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해고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서울 거주자임에도 포항으로 발령을 내버리는 식으로 자진해서 직장을 그만두게 한다고 한다. 즉, 자본주의와 관료제에서 성공을 거둔 것같은 사람들에게도 결국 그 체제로부터 외면 받는 시기가 찾아오고 그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걸어온 길을 살피며 자신의 실존을 깨닫는 필연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변신’의 그레고르 역시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동화나 서정 소설이었다면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었음에 슬퍼하고 그와 교감하려고 노력했겠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이 소설에서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라는 역할을 잃은 그레고르는 여전히 그레고르임에도 가족들은 그를 냉대하고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저것을 죽여버려야 함’을 강조한다. 즉, 그레고르는 실존하며 그의 본질도 변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역할을 상실함에 따라 그의 실존 이유도 사라진 것이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실존은 오직 자본으로 되물어질 뿐이며, 자본적 의미를 상실한 실존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령 그것이 비가시적인 폭력일지라도 체제의 외면을 받은 인간 존재는 고립에 시달리며 결국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처럼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두 소설의 비극적 결말은 자본주의 사회의 잔인성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며, 과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존을 묻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인간이 단지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하는 현상은 마치 세계 대전을 통해 인간이 전쟁 도구로 전락하고 대공황 시기에 사람들이 고립 속에 던져지던 상황과 맞물리며, 결국 인류는 다시 한 번 인간의 실존을 물을 과도기에 서있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의 부인인 린다는 윌리가 엄청나게 훌륭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를 ‘하나의 인간’이라고 칭하며 그에게 관심을 줄 것을 강조한다. 린다의 말처럼, 더 기계화되고 몰인격적으로 변해가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또 다른 체제이기 이전에 인간 존재들 간의 공감과 연대, 관심을 통해 실존의 의미를 모색하는 것이다. 누군가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출장 간 것’처럼 여기며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사회는 분명히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