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아무리 서로가 많은 것을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말로 전달되는 것, 행동으로 보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와 닮은 사람들에겐 관대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지 못하다. 외적인 면이든 내적인 면이든 나와 닮았다는 것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내가 그에 대해 좀 더 깊게 아는 듯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함께 보내는 시간의 양도 무시할 수 없다. 절대적인 시간의 양이 관계의 정도를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대체로 많은 시간을 함께 공유할수록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것이 통상적으로 ‘가족’이라는 개념이 ‘깊은 관계’를 지닌다고 보는 이유이다. 일반화 하긴 어렵지만 통상적으로 가족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유아기 때부터 많은 것을 공유한 관계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한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아무리 가족 사이일지라도.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에서 벌레로 변해버린 한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는 벌레로 변하기 전날까지 가족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던 사람이며 자신이 벌레가 되었음을 인지하였을 때에도 당장 출근을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 그에게는 자신이 부양해야하는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벌레로 변했음을 알게 된 가족은 서서히 그를 외면해나간다. 외형이 벌레임은 물론이고 대화조차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아들, 오빠로서 존재하던 그레고르는 벌레가 됨으로써 가족 구성원의 자격을 박탈당한 것이다. 그의 몸짓은 위협이었으며 그의 생존은 부담이었다. 결국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치료받지 못한 그레고르는 방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흥미로웠던 점은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어 경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오로지 그에게만 의존하며 살던 가족 구성원들이 스스로 경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레고르고 벌레인 모습으로 그것을 인지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동안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부양에 익숙해져 있어 스스로 경제 활동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레고르는 불쌍한, 가족을 위해 희생하다 결국 가족에게 버려지고만 사람으로 이해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이 소설이 전적으로 그레고르의 시점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레고르를 화자로 설정하여 소설을 진행한 것은 소외, 외로움, 우울 등과 같은 감정을 끌어내기에 적합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일치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만약 이 소설이 가족의 입장에서 쓰여진다면 완전 다른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다. 하루아침에 오빠가 혹은 아들이 벌레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어느 누가 담담히 그를 부양하고 보살필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대화도 어려운 상태에서 이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벌레가 되면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했지만 그것을 박탈한 것은 가족의 잘못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대화나 이해가 어려워진 상황 자체가 비극적인 결말을 야기했을 뿐이다.
어렸을 때 「변신」을 읽었을 때에는 그저 무섭고 징그럽다는 느낌밖에 없었다. 벌레가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으면서 벌레의 모습 그 자체가 징그러운 것이 아니라 벌레가 되었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대화의 단절, 그로인한 양 측의 좌절과 우울함이 더욱 공포로 다가왔다. 그 단절이 가족의 태도를 변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레고르의 죽음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이 늘 그렇듯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았음에 감탄하며 후에 다시 한 번 읽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