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혐오가 자기혐오가 되기까지
프라하로 가는 버스 안, 동화 같은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이 도시를
마주하기 전 나름의 배경지식을 가져가고 싶어 카프카를 읽었다. 옛날에 읽었던 터라 줄거리는 알지만 이
짧은 대표작으로부터 카프카라는 작가의 매력을 느끼고 싶었다.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프라하에서 한 유대인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래로는 두 남동생이 태어났지만 일찍 죽고 세 여동생이 있었다.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자기 이름을 내건 액세서리 판매점을 만든 사업가로, 일에 열성적이고 포부 있는
남성이었다. 문학을 좋아하는 조용한 소년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존재였고 때로는 두려움을
안기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느꼈던 거리감은 아마 그가 성인이 되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됐던
것으로 보인다.
변신은 카프카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의
본래 직업은 작은 회사의 영업사원. 카프카 역시 24살부터
39살까지 프라하의 한 보험회사에서 일했다. 노동법이나 노조결성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이니 당시 체코의 노동환경이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 카프카의 관심은 오직 짬짬이
하는 창작에 있었고 낮 동안의 일은 그를 사회의 지루한 한 부분으로만 만들 뿐이었다. 쳇바퀴 같은 삶에
권태를 느낀 그는 궁금했고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침대 위에 자신이 아닌 벌레 한 마리가 있다면 세상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상상하게 된다. 물론 변화의 결과는 좋지 않다. 딱딱하고 거대한 몸체에 여러 개의
다리가 매달려 팔랑거리는 모습은 방문을 연 모든 사람들을 경악시킨다. 가족들은 그를 여전히 그레고리로
여겨 밥을 주고 방을 치워주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의 존재는 두려움만 증폭시킬 뿐이다. 가장 큰 반응을
보이는 이는 아버지. 한때는 잘나가던 사업가였지만 파산 후 몇 년 째 집에서 놀고 있는 아버지는 옛날의
강인함을 잃고 초라해지는 카프카 자신의 아버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카프카는 자기를 향한 아버지의 찌푸린
눈살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고, 아버지와의 화해는 영원히 어려울 것을 알았다. 그레고리의 아버지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를 지팡이로 위협해 방으로 밀어넣고 혹여나 그레고리가 탈출하면 불같이
화를 내 결국엔 그의 죽음을 불러온다.
이 소설은 관통하는 키워드는 혐오다. 우리는 흔히 모습이나 행동으로
말미암아 혐오를 일으키는 사람을 ‘벌레같다’고 한다. 카프카는 그레고리를 개구리나 호두까기 인형이 아닌 거대한 벌레로 변신시킴으로써 반박의 여지가 없는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자신에게 익숙한 형상이 아니면 사람은 쉽게 혐오를 느낀다.
평소 눈에 안 띄는 채네 분비물이나 작은 생물체에게서 혐오를 느끼는 이유가 그렇다. 이러한
외관상의 모습에 더해지는 부정적인 정보 또한 사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혐오를 증가시킨다. 더럽다거나 건강에
해롭다는 정보 말이다. 다리를 꿈틀거리며 끈적한 액체를 분비하는 그레고리의 외관은 가족들마저도 두려움을
갖게 하고 이들은 그레고리가 자신들을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방에 감금시킨다. 어머니는 그를
볼 때마다 까무러치고, 누이동생은 방에 들어와 똥이라도 치우듯이 재빠르게 할 일을 하고 나간다. 혐오는 타인으로부터 만들어져 자기혐오로 확대된다. 그레고리 자신도
처음에는 벌레로 변한 몸을 보고는 ‘이게 웬 변고란 말인가’하며
가족들이 저를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가족에 의한 혐오는 점차 스스로를 소파 밑에 가두고 커버로
덮게 만든다.
카프카는 평생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질시를 받았고, 종교에 무관심했으므로
유대인 사회에도 잘 소속되지 못했다. 말년에는 우울증과 건강 악화로 일을 그만두고 결핵 요양소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일도 하지 못하고 어느 집단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한 마리의 벌레를 떠올린
건 아닐까. 죽는 순간에도 친구에게 자신의 원고를 불태우라 청했던 것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자신의
글마저도 부정했던 자기혐오의 한 면모가 아니었을까.
프라하에 도착했다. 우울한 소설을 읽어설까. 뿌연 하늘이 더 암울해보인다. 해가 낮아져 온통 노란 프라하는 태연하게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상은 갈수록 세련되어지지만 우리 옆의 사람들을 소파 밑으로 내모는
혐오는 여전히 존재한다. 장애인, 성소수자, 서로 다른 인종을 둘러싼 반감은 대체로 그들이 우리에게 익숙치 않다는 데서 비롯된다. 다수의 타인에게서 받는 혐오는 그들의 자아에 상처를 입히고 자기부정을 낳게 한다.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수치스러워하게 하고 사회와의 접촉을 단절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하는 변고를 당한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벌레의 등에 꽂힐
사과가 아니라 눈물을 흘리게 할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