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작품, 그 중에서도 변신은 꼭 읽어봐야 한다고 해서 책을 빌렸다. 생각보다 얇은 책이라 처음에는 갸웃했다. 책의 분량이 작품성과는 관련 없지만 그래도 카프카는 많은 책을 쓴 대작가이지 않은가. 게다가 ‘변신’은 내용도 어렵지 않아 술술 읽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을 덮고 난 후의 여운은 계속 갔다. 독서시간보다 길게 상념이 남았다. 응어리가 맺힌 듯이 먹먹했다. 카프카는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이야기를 풀어갔다. 작가의 진정한 역량은 ‘무엇을 쓰는가’보다 ‘무엇을 쓰지 않는가’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간략하게 줄거리를 살펴보면 이렇다. 나 ‘그레고르 잠자’는 평범한 세일즈맨이다. 몇 년 전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기울어진 가세를 바로 세우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싫어한다. 꾹 참고 가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 또 그의 여동생은 그가 살아가는 이유다. 그의 생활에 변화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찾아온다. 눈을 뜨니 잠자의 몸이 벌레로 바뀐 것이다. 꿈이겠거니 했지만 그는 진짜로 벌레가 되었다. 그는 충격에 방문을 잠그고 가족들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는다. 회사에서 사람까지 찾아오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나가는데 우려했던 대로 모두 충격에 빠진다. 지배인은 도망가고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방문을 다시 닫아버린다. 잠자는 가족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가족들의 잠자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자꾸 신경 쓰인 것은 가족들은 물론이고, 그레고르 잠자 자신도 왜 자신이 벌레가 되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점이었다. 굳이 의미를 파헤치지 않고 인간성을 상실한 것에 대해 괘념치 않는다. 흔히 이 작품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인간성을 나타냈다고 한다. 빠르게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개인주의화되던 유럽이었다. 카프카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그저 적응하는 사람들을 나타내고 싶었을까. 작가는 끝까지 그레고르는 왜 벌레가 되어야만 했는지 따위는 암시하지 않는다.
벌레가 된 잠자는 자기 방에 갇힌다. 사실 잠자는 오히려 가족들을 생각하며 숨어있기로 결심한다. 매일 여동생이 방에 찾아와 청소하고, 밥을 줄때도 혐오스런 자신의 모습이 덜 들어나게 가렸다. 어머니는 들어오지는 못하지만 자신을 위한다는 것을 느낀 잠자는 가족들을 연민한다. 잠자가 일을 하지 못하자 가족들은 수입이 없어 근근이 살아간다. 잠자가 직장이 있을 때의 아버지는 무능했다. 하지만 잠자가 없자 직장도 새로 구하고 가정 내 권위도 다시 찾는다. 그래도 돈이 모자라자 빈 방에 세입자들도 둔다.
처음에는 가족들도 잠자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얼마 동안만 고생하며 벌레를 돌보기로 한다. 하지만 의사소통도 안 되고, 나날이 벌레의 움직임만 자연스러워지자 가족들은 포기한다. 오히려 이 ‘골치덩어리’가 왜 사라지지 않는지, 어떻게 보낼 수 있는지 만을 생각한다. 믿었던 여동생마저 이 벌레는 더 이상 오빠가 아니라고 말한다. 결정적 사건은 세입자들이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거실에 모여 들을 때 발생한다. 사실 여동생은 바이올린 연주에 능해 잠자가 그녀를 음악학교에 보내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다들 넋을 놓고 감상하는 와중 잠자도 거실로 기어 나왔다. 자신이 벌레라는 건 잊은 채였다. 바이올린 연주가 끝나자 당연히 잠자는 눈에 띄었고, 세입자들은 계약을 취소한다. 화가 난 아버지는 잠자를 방으로 몰아내며 거실의 사과들을 던진다. 잠자는 등에 사과가 박힌 채 고통을 호소한다. 이 사건 이후로 가족들은 벌레를 방치한다. 그리고 벌레 때문에 생계가 힘들어졌다고 한탄한다. 인간 잠자는 잊은 지 오래다. 잠자는 굶주림과 고통 속에 기운을 잃어간다. 그러던 와중 새 가정부 할머니가 집에 오게 되었는데 그녀는 잠자가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 가정부는 잠자를 지속적으로 놀리다가, 잠자가 죽는 것을 발견한다. 이 소식은 들은 가족들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며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다. 가정부는 넌지시 벌레를 자기가 죽였다는 것을 눈짓주지만 아버지는 입단속을 시킨 채 가족들과 웃는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 독자는 의아하다. 만약 이 책이 해피엔딩이라면 잠자는 사람으로 돌아오고, 가족들은 잠자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으며 서로를 더 아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새드엔딩이라면 가족들은 잠자를 잃은 것에 슬퍼하며 좌절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잠자의 죽음과 함께 가족들이 행복해진다. 아이러니하다. 중간에 벌레로 인한 괴로움이 잠자를 잃은 슬픔보다 커진 것이다. 아니 자식을 잃은 슬픔은 애초에 없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벌레가 죽었을 땐 해방감만이 남아있었다.
현대에 도시화가 되면서 대부분의 가족들은 핵가족 형태를 이루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족 간에도 소통이 적어졌다. 어쩌면 서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일에 몰두한 나머지 소홀해지진 않았을까. 돈을 버는 의무, 공부를 한다는 의무 때문에 가족에게 잘 하는 의무는 사라졌다. 가족관계는 인간관계의 시발점이다. 가족에게 못하는 사람치고 사회생활 잘 하는 사람은 드물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모형제와 처음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런 가족 공동체를 믿고 있던 나다. 하지만 이 소설을 보면서 그렇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 가족이 벌레로 변한다면 지극정성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벌레는 좀 그러니 식물인간이 된다면? 치매에 걸리셔서 내 얼굴도 알아볼 수 없다면? 그 때에도 나는 가족을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는가. 가족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사랑의 범위는 제한될 수 있을까. 뉴스에 가끔 인륜애를 해치는 사람들이 나온다. 예전엔 그런 자들을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변신’에 나오는 가족들에겐 똑같은 잣대를 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