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뭔가 뒤숭숭한 꿈을 꾸다 깨어났다. 그런데
자신이 엄청나게 커다란 한 마리 해충으로 변해 있었다’
이 책의 도입부는
내가 읽어본 그 어떤 소설보다 더 강렬했다. 어느 날 눈을 떴는데, 내가
벌레라니? 만약 내가 깨자마자 맘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흉측한 몸을 봤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하거나 심장마비에 걸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도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출근을 걱정한다. 문득 잠들기 전부터 등교/출근 걱정을 하고, 몇 시에 일어나든 기계적으로 칼같이 시간을 지키며
살인적인 스케줄의 하루를 보내는 현대의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떠올랐다. 이런 상황 속에서 출근 걱정을
했다는 것이 굉장히 ‘인간’답지 않고 기계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날의 사람들도 이런 경우들이 있을 것 같아 조금 씁쓸해졌다.
그레고르 잠자의
집은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과 함께 네 식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은퇴한 후, 집의 수입은 온전히
그레고리 잠자에게 달려 있었고, 그의 ‘변신’ 이후 가정은 곤궁함을 겪게 된다. 퇴직했던 아버지는 다시 은행 경비원으로
돌아 갔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며 살림에 보탰다. 바이올린
연주를 좋아하던 어렸던 여동생도 일을 시작한다.
이것만으로는 안되었는지, 그들은 집에 세를 주고, 젊은 남자 세 명이 입주한다. 그들이 오고 저녁 식사 때 여동생이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그레고르는
오랜만에 듣는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에 방에서 나와 거실로 향하지만, 곧 입주자 세 명의 눈에 띄고, 그들은 경악한다. 이런 벌레 옆에서 살 수 없다, 당장 방을 빼겠다고 말하며, 돈은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아니, 오히려 소송을 걸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고 한다. 분노한 아버지는 그레고르에게 사과를 무더기로 집어 던지고, 그것은
그의 몸에 박혀 깊은 상처를 만든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들은 지쳐가고, 가장 그레고르를 이해해주던 여동생마저 “저건
오빠가 아니야, 우린 저걸 내다 버려야 해. 죽여야 해”라고 말한다. 더 이상 경제 활동을 포함한 그 어떤 활동도 할 수
없게 된 그는 그저 가족들의 골칫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잠자 씨는 “자, 이제
우리, 하느님께 감사 드려도 되겠다”라고 말한다.
이 소설은 많은
현대인들에게 씁쓸함을 선사한다. 꼭 벌레로 변하는 판타지스럽고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다던가, 뇌사 상태에 빠진다던가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혹은 가족 중 한 명이 치매 상태가 온다던가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내가 그런 상황에 빠지면, 내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아니면 반대로 내가 그 보호자의 입장이라고 생각해보자. 당연히 초반에는
위로해주고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고,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시간이 흘러 1년,
2년, 아니 10년, 20년이 지나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보호자나 가족들이
장기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을 보러 가는 빈도만 봐도 알 수 있다. 더 이상 그 어떤 생산 활동도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을 언제까지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책임지고 부양할 수 있을까? 그레고리 잠자의 가족들을
무작정 욕할 수만은 없는 이유이다.
또한,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가치’가 다른 가치가 아닌, 오직
그의 ‘능력(그것이 미래에 돈을 벌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이든
아니면 경제적 능력이든 뭔가 도움이 되는 능력)’에 의해 판단되는 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아마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도 그가 돈을 벌어 올 때는 그의 비위를 맞추고 그를 잘 대우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자마자 그의 가족들은 그를 챙기기보다는
각자 살 길 찾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게 우리 눈에 100% 나빠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 역시 능력만능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자라면서
공부를 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유명한 직장에 취직하려는
그 모든 이유가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함이다. 애당초에
이런 노력이 개인의 가치를 높인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 우리 사회이다. 어릴 적 몇몇 몰상식한 부모들이
길의 환경 미화원 분들을 보며 “너, 공부 못하면 저렇게
쓰레기나 치우는 사람이 된다”고 말하는 것을 지나가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잘못된-물론 수업시간에 잘못됨이란 없고, 개인의 판단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배웠지만 난 저런 언사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도, 우리가 ‘돈’이 많으면 안락한 삶을 살 수 있고, ‘가치’있는 인간이 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카프카는 이런 우리 사회를 잠자 가(家)를 통해 비판한 것이 아닐까.
문득 이런 책을
쓴 프란츠 카프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프란츠 카프카는 어린 시절 감성적인 아이였지만,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이런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강압적인 방식으로 자식을 키웠지만, 프란츠는 이런 교육방식과 맞지 않았고, 상처를 받으며 자랐다.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며 많은 종류의 인간 군상을 만났고,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살면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사후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추앙
받고 작품을 인정받는 등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어두웠던 유년
시절과 가난한 공장의 노동자들을 많이 만났던 직장 생활을 통해 그는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많이 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읽은 ‘변신’이라는
소설 외에도, 그의 작품 세계는 일관되게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카프카를
통해 다시 한 번 부귀라는 밝은 빛 속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