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용도 짧고 사건도 지극히 간명해서 술술 읽기에는 참 편하지만, 발행된 지 100년이 넘어가는 지금에도 현실 이입이 가능한 작품이라 씁쓸하게 읽게 되는 책이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의류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으나, 어느 날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이 벌레의 형태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전까지는 파산한 아버지를 대신해 집에서 유일하게 경제력을 가진 ‘든든한 아들’, ‘고마운 오빠’라는 존재였지만, 벌레로 변해버린 후 모든 것이 뒤바뀐다. 그를 질책하러 집까지 찾아온 직장상사는 그의 몰골을 보고 도망치며, 가족들도 변해버린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레고르 잠자를 대신해 아버지와 여동생이 일하기 시작하고 나서는 박대가 점점 심해진다. 결국 그레고르 잠자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큰 상처를 입고 앓다가 죽게 된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시체는 가정부가 쓰레기 버리듯 처리하며, 가족들은 나들이하러 집 밖에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소설이 마무리된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를 대하는 가족들의 냉담한 태도는 그레고르 잠자가 가족을 위해 보였던 헌신적인 태도와 대비되며 안타까움을 부각시킨다. 그레고르 잠자는 의류회사 영업사원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불만족스러워한다. 잦은 출장 때문에 기차 시간에 늦지 않도록 늘 신경써야 하고, 제대로 식사할 시간도 없고, 대인관계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며, 업무량 때문에 늘 부족한 수면시간에 고충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그레고르 잠자가 직장에서 기계처럼 일하는 이유는 파산한 아버지의 빚 때문이었다. 빚을 갚고 생계를 유지하며 여동생에게 용돈도 챙겨 주는 가장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레고르 잠자가 경제력을 잃게 되자 가족들은 그에게 의지해 살던 생활을 청산한다. 빚까지 진 무능한 가장이었던 아버지는 다시 직업을 구했고, 여동생도 용돈을 받아쓰는 생활을 그만두고 직장을 얻어 일한다. 일전에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쇠약해진 그레고르 잠자는 ‘그레고르 잠자를 내다 버리자’는 여동생과 아버지의 방문 밖 대화를 들으며 예전 가족들의 애정을 회상하고, 그날 밤 목숨을 잃는다.
결과적으로 가족들은 ‘생활비를 버는’ 그레고르 잠자가 필요했던 것뿐이고, 직장에서도 ‘기계처럼 일하는’ 그레고르 잠자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직업이 싫어도 가족과 회사를 위해 일했고, 필요 없어지자 매정하게 버려지는 주인공을 ‘소설이니까’라고 마냥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이용가치’가 없으면 매정해지는 사회의 모습이 100년 전의 소설 속과 지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그레고르 잠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가차없이 배제하는 사회 때문은 아니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를 대체한 직장의 경우는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책이 쓰인 20세기에 피고용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가 미비했음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필요한 사람의 노동력을 대가를 주고 고용하고,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은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가족이다. ‘어떻게 가족인데 그렇게 매정하게 버리냐’는 감정적인 이유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레고리 잠자의 아버지는 자신의 사업실패로 생긴 빚을 자식에게 떠넘기고, 자식의 경제력을 빌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레고리 잠자가 벌레로 변하며 경제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직장을 구해 일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자식의 경제력에 빌붙어 자신의 채무를 떠넘기고 생계를 유지했으면서, 그 자식이 경제적으로 무력해지자 가장 먼저 등돌리고 멸시하는 사람이 아버지다. 취직한 것을 보면 자신의 과오로 생긴 빚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 잠자에게 큰 상처를 입혀 결국 죽게 만든 당사자인 것까지도 고려한다면, 자신의 자식에게 무책임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상이었다.
그레고리 잠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책임을 다해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생긴 변신 때문에 한순간에 일생이 뒤바뀌어 버린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외면하는 사회’는 생존이 목표인 모든 개체에게서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고등개체일수록 약자가 도태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장치가 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책임을 다하면서도 ‘이용가치가 떨어지더라도 사람들이 등돌리지 않는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