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불상사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러셀이 “칠면조의 역설”에서 말한 칠면조처럼 내일도 오늘과 비슷한 하루를 보낼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에게는 칠면조가 도축을 당하는 날, 즉 주인공이 벌레로 변하는 예상치 못한 날이 찾아온다. 이런 변신의 원인은 소설의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가 염원하던 외판원이라는 직업으로부터의 해방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직업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가족으로부터 퇴출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퇴출은 가족 구성원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수입을 갖게 될수록 더욱더 심회된다. 결국에 그레고르는 가족들의 소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해방감을 느낌과 동시에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이사를 간다.
과연 그레고르가 가족으로부터 인간의 취급을 당하지 못했던 것은 단지 경제력을 상실한 인간이라는 이유가 전부인가? 이 책과 관련된 많은 해설들은 이 책은 필요한 존재가 되지 못한 인간의 존재성 상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그레고르가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이유는 경제력의 상실 보다 벌레가 되어 소통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책 내용을 살펴보면 벌레가 되기 이전부터 그레고리의 가정은 화목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본문 중 “그레고리는 여동생과만 가깝게 지내오고 있을 뿐이다.” 또는 “부모님은 그들의 이런 순진무구한 대화를 좋아하지 않으셨다.”라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젠장, 보살펴드려야 할 부모님만 안 계셨어도. 일지감치 사직서를 제출했을 텐데.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하겠지. 내가 생각하는 것도 말하고 내가 할 것들 모두도 말했을 텐데. 사장에게 내가 지금 발끈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이라고 말한 그레고르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속사정을 가정에 털어 놓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며 버텨내려 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가족에게 조차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려하는 그레고리는 결국에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벌레로 형상화되게 된다. 반면에 초반에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 때문에 분위기가 침체된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대화가 줄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오히려 가족들은 미래에 대한 대화를 지속하며 결속력을 단단히 하여 경제적 어려움도 극복한다. 그레고리만 자신의 희생이 불가피하다 생각하였을 뿐 가족들은 그의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비록 그레고르의 외형이 벌레가 되었어도 대화가 가능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가족들에게 표현할 수 있고 주인공이 그것에 있어 적극적이었다면 똑같은 대우를 받았을까? 몇 천 년 전의 시대에 살았던 아리스토탈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주창한 것처럼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서로 공생관계를 맺어왔다. 물론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을 유지하기 필수적인 사회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소외는 경제적 결핍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 의한 것이라 생각한다. 일상적인 관계에 매몰되어 있을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고독과 허무가 모든 이들과의 관계가 단절 되었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벌레로 변하고 가족들이 벌레가 된 주인공을 배척하는 내용들이 극단적이긴 하나 관계와 소외에 대해 생각해 생각해볼 거리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