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라는 존재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물리적인 외향으로? 그렇다면 성형으로 다른 생김새를 가지게 되면 그땐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 그럼 장기들은? 장기이식을 받아 구성이 모두 내 것이 아니게 되면 그땐 내가 아닌가? 심장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면? 뇌는? 뇌의 10%를 이식 받았다면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내 사고방식은 그 사람과 공유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디까지가 나일까?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 접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끊임없이 ‘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회문화 시간에 상징적 상호작용론이라는 것을 배운다. 사람들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미를 부여해 각각에 가치를 매긴다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라는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부여해주는 의미 속에서, 내가 인식하는 가치로서 살아간다. 만약 내 의미가 없어지면 그땐 나는 무엇으로 존재할까. 책 속 그처럼 바퀴벌레가 되고마는 걸까. 인간의 수단화는 모던타임즈에 잘 반영되어 있다. 공장을 원활하게 작동시키기 위한 하나의 부품으로서 존재하는 인간. 타인이 극 속 찰리 채플린에게 부여한 의미는 딱 거기까지다. 자신도 깊은 생각 없이, 자신에 대한 고민 없이 그렇게 살아간다. 타인의 목적을 위해 자신이 수단화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조차 없게 되면 그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의미 없는 인간,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다. 모던타임즈 속 공장, 대학교 팀플, 동아리, [변신]처럼 가정 안에서도. 가장이 생계를 위한 돈벌이, 돈 벌어오는 기계로서 살아가야 하면 그는 주변 사람에게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나’에 대한 자부심을 지킬 수 있을까. 눈을 떴을 때 바퀴벌레로 변해있는 [변신] 속 그레고리 잠자는 애정을 나누었다 생각했던 이들에게도 외면 당하고 ‘벌레’ 취급을 받는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밥을 챙겨주던 여동생마저 ‘괴물’이라고 부르며 그를 거부한다. 마지막에는 그의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힌 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창밖을 보며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과연 ‘인간’다운 삶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극단적으로 주인공이 바퀴벌레로 바뀌었다는 설정으로 시작을 했지만, 그가 정말로 바퀴벌레로 변신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무능력한 존재로 인식하고 그에 마땅한 대우를 했기에 그가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분명 이전에는 당당한 가장으로서, 남자로서, 사람으로서 살아갔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있었을 것이고, 삶에 대한 목표, 삶의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실현할 수 있게 해주는 인간이라는 자격,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격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누가 박탈하고, 어떤 과정으로 잃게 되는 것일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독자에게 남기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