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왕의 사회학”은 지방대 학생들의 삶을 사회학적으로 연구한 바를 엮어 발간한 책이다. 질적 연구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들과의 대담 내용이 서술되며 간간이 작가가 그런 대화가 이뤄진 배경을 부연하기도 하며 사회학적 개념을 동원하여 종합적으로 현상을 분석한다. 특히 지방대 졸업생의 경우 지방에 거주하는 경우, 서울로 올라간 경우, 상경 후 다시 귀향한 경우로 집단을 나눠서 연구하였다. 전반적으로 지방대 졸업생은 재학생과 유사한 면도 있지만 다른 면을 발전시키기도 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삶의 양식은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기인한 요인이 크다. 이런 지방대 졸업생의 인생은 한마디로 가족 휴먼 다큐멘터리라고 요약된다.
졸업생들이라고 재학생과 다르지 않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가족의 행복을 가치로 설정한다. 개인을 중심에 둔 선호의 언어 대신 가족을 중심으로 두는 가족주의 언어로 서술한다. 이들에게 가족은 지향가족이며 가족의 행복은 곧 주변 습속에 따라 안락한 상태를 유지하는 상태이다. 따라서 행복으로 가는 길은 평범한 가족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효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미혼자는 가부장적 핵가족을 모범으로 삼아 가족을 꾸리고자 꿈꾼다. 그렇다고 대안적 언어도 없다. 다만, 기혼자의 경우 자신이 새로 구성한 생식가족을 중심으로 행복을 꾸리며 여기서 효도는 좋은 부부관계, 자식 양육 등이다. 이런 가족을 잘 부양하는 가족주의적 삶이 좋은 삶이다.
그러나 졸업생들이 재학생과 다른 부분도 있다. 그 중 하나는 가족의 행복과 개인의 선호를 병치하는 시도이다. 재학생도 선호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정작 자신의 선호를 잘 모른다. 대신 졸업생은 선호를 시험할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인식이 뚜렷하다. 이들에게 선호, 즉 사치는 내면적 쾌락이다. 사회에서 인정받기 힘든 상황에서 자기애적 면이 있다. 두 가치의 병치에는 세 가지 대응전략이 나오는데 첫째는 단순 ‘병치’이다. 가족과 자신의 행복이 동시에 가능하다. 단, 갈등을 완전히 해소했다기 보다 충돌을 잠시 피한 상태이다. 한편, 병치 상황에서 모순이 커지거나 처음부터 ‘양자택일’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끝으로 ‘상호침투’의 경우가 있다. 졸업생은 좁은 가족주의 안에서는 개인의 자유 성취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더 큰 공동체를 바란다. 다만 이는 가부장의 권위를 내려놓을 때 가능하다. 결국 보수주의적 가족주의와 나르시시즘적 개인주의가 불안한 동거를 한다.
이들이 이렇게 동요하고 있는 것은 지방대생 독립을 방해하는 사회구조적 힘도 있으나 그들의 문화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의 집단스타일은 특유의 적당주의이다. 적당주의 잡단은 미래 지향적으로 수단 목표를 활용하고 경쟁하는 대신 그저 함께 어울리는 현재적 공동체이다. 이는 근접성에 의한 결집이 바탕이라 개인주의가 어렵다. 졸업생들은 졸업 후에도 적당주의를 유지하려 한다. 먼저 지방에서는 적당주의가 가능한 환경을 찾는다. 이는 가족의 뒷받침이 있고 성과를 압박하지 않는 직장이라면 가능하다. 한편 서울에 간 경우 서울의 집단 스타일인 몰입주의로부터 문화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적당주의를 버리고 몰입주의를 배우려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단지 흉내를 낸다. 왜냐하면 몰입주의를 하려면 성공가능성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저 버티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안 되면 결국 지방으로 돌아가서 적당주의를 모색한다.
지방대를 졸업한 후에도 적당주의가 영향을 미치는 배경에는 사회자본과 문화자본의 결핍이 있다. 사회자본은 호혜성의 규범과 신뢰를 핵심으로 하는 ‘정서적 연결망’, 인지적 성격을 지닌 ‘사회적 연결망’, 사회적 자본의 작동 결과 나오는 ‘기능적 효과’가 핵심이다. 문제는 졸업생의 사회자본은 대부분 가족 내지는 유사가족의 성격이라는 점이다. 졸업생의 정서적 연결망, 즉 유사가족 안에서는 호혜성의 규칙이 느슨하다. 이는 가진 것 없는 서로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배경적 기대 덕이다. 이들이 가진 자원이 교환되는 사회적 연결망은 대학을 다니며 형성한 강한 유대다. 이는 폐쇄적이고 동질성이 높은 집단이라 응집력은 강하지만 확장성이 낮다. 마지막으로 정서 및 사회적 연결망이 작동해 나오는 효과가 적다. 가족 밖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사회로 나가려 않는다. 다만, 지방에서는 유의미하다. 성찰적 겸연쩍음으로 눈높이를 낮춰서 시작한 이들은 특유의 성실성으로 주변에 도움을 얻고 가진 것 없어도 연애하고 결혼해서 애도 낳는다.
다음으로 문화자본 역시 상징권력이 없다. 문화자본은 몸과 연관된 ‘체화된 상태’, 예술품 등으로 나타나는 ‘객체화된 상태’, 공식적 인증으로 나오는 ‘제도화된 상태’로 나눠진다. 일단 이들은 자본으로 전환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부모가 먹고살기 바빴기도 했고 원채 물려줄 자본도 없었다. 기대도 낮아서 교육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계급 재생산의 핵심 고리이며, 단시간에 획득이 불가능하다. 다음으로 졸업생도 미적 감흥을 원한다. 하지만 기회가 없었다. 장시간 투자가 필요 없는 음주가무가 전부다. 그나마 해외여행을 가지만 경제자본이 되기 힘든 개인적 체험으로 그친다.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졸업장은 오히려 짐이다. 꼬리표로 남아 승진을 막는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취업학과를 가려하지만 실상 그런 곳은 없고, 대학도 공무원 사관학교를 부르짖고 있는 형편인데 실상 먼저 공무원이 되는 것이 ‘장땡’인 것이 현실이다.
이런 구조적 한계와 그 속에서 개인과 가족 사이에서 동요하는 졸업생의 삶을 정리하면 ‘가족 휴먼 다큐멘터리’라고 한다. 이들은 사회적 문화적 자본만 결여된 것이 아니라 문화화용 능력도 부족해서 더욱 가족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은 스스로 서사를 만들어 삶을 산 적이 없다. 단지 사회적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을 뿐이다. 이들이 가진 문화코드는 가족주의 코드다. 문화코드는 공유된 사람들 사이에서만 의미 있게 상호작용 한다. 그래서 졸업생들은 문제가 생기면 베이스캠프인 집으로 돌아온다. 공동체 및 가족 해체는 지방엔 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굳건하다. 그 와중에 졸업생의 삶이 휴먼 다큐멘터리가 되는 이유는 이들이 부부중심의 가부장적 핵가족을 이상향으로 삼지만 실상 지방대생 능력으로 달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부양을 위해 장시간 노동을 하며 아내는 임금 노동도 한다. 겉은 중산층의 삶이지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