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본 가치의 방향성
종교관을 중심으로 –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며,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사실과 가치의 연관성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생활 전반에서 사랑하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쓰면서 종교에 대한 고찰을 드러냈다. 이런 모습은 아인슈타인이 가지고 있던 사물 중심의 질서에 대한 감각이 투영된 것이다. 그는 수많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 자연법칙의 단순함을 깨달았고 이러한 질서를 체득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상대성 이론도 그와 마찬가지다.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인과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세계에 대한 객관성의 틀을 조금씩 깨뜨린 것이다. 아인슈타인에 있어 종교와 과학은 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과학적 성과는 종교와의 갈등에 거의 구애받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플랑크 역시 종교와 과학이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이젠 베르크는 역설적으로 아인슈타인과 플랑크의 과학과 종교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반기를 들었다. 합일이 된다는 건 역설적으로 두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문제로 제기한 이분법적 사고에 따르면 자연과학의 기본적인 과제는 객관적인 세계를 올바르게 진술하고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이 문제가 되고 그것들의 이론적 정립을 추구하여 기술적으로 합목적적인 행동의 기반이 된다고 설명했다. 반면, 종교는 가치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 사실 자체보다는 어떤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종교는 윤리의 기반이 된다고 설명했다.
18세기 이래로 발생한 첨예한 종교와 과학의 갈등도 이와 같은 차이점에 근거한다. 종교가 처음 발생했던 시대에는 해당 공동체가 보유한 지식이 그 시대의 정신적 형식과 일치했다. 당대 지식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종교의 가치와 사상이었다. 그래서 그 가치를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런 정신적인 형식이 곧 공동체의 전체적인 지식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고 과학의 발전에 따라 얻게 되는 새로운 지식은 옛 정신적 가치형식들을 날려버릴 위험을 증가시킨다. 하이젠베르크는 지식과 믿음을 서로 명백하게 구분하는 것은 그 공동체에 속해 있는 아주 제한된 시기의 응급처치에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상들과 비유들을 유연성 없이 자연과학적인 주장으로 해석하다보니 갈등이 자연스럽게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책의 전반에서 기존 질서의 비합리성에 대한 양자론의 의문과 그에 대한 해석은 많은 부분에서 닐스 보어가 제시한 상보성 개념이 잘 설명하고 있었다. 닐스 보어에 따르면 상보성은 서로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는 역설적인 경험들을 구성주의나 반실재론적인 입장이 아닌 실재론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적절히 해소할 수 있다. 상보성의 개념은 관찰 방식과 무관한 물질적 객체라는 개념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관념적인 추론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양철학과 종교에서 볼 수 있는 객체에 대한 상보적인 표상으로 어떤 객체에도 개의치 않는 주체적 인식 또한 관념적인 추론이다. 이런 연관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장기적으로 중용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런 식의 사고에 부응하는 과학만이 다양한 종교를 관용적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전체를 더 잘 조망할 수 있으므로 가치의 세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닐스 보어에 따르면 종교는 우리의 삶과 죽음, 나에 대한 문제를 다루며 교리는 행동의 모태, 실존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인간 우리가 그것들과 무관하게 제3자로서 밖에서 바라볼 수 없다. 즉, 이를 통해 과학자로서 자기기만과 내적 모순으로부터의 경계와 지나친 이성주의로부터의 탈피에 대해 역설한 것이다.
과학자로서 하이젠 베르크는 양자론의 통계적 해석과 지각을 객관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양자론에서 모든 지각은 관찰 상황과 관련되는데 지각의 결과는 더 이상 고전물리학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객관화 될 수 없다는 큰 명제를 확립한다. 그는 더욱이 자신이 독일정부의 핵분열 실험에 참여하게 되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과학자의 자세에 대해 논했다.
발견자로서 과학자는 어떤 객관적 지식의 발견 전에는 그것이 어떻게 활용될지 알지 못하며 발견 뒤에도 실제적인 활동까지 이어질지 예측 불가능 하다. 그러나 발명자는 애초에 특정한 실용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실험을 진행하므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발명자로서 과학자는 필연적으로 각 개인이 어느 정도의 책임을 지게 된다고 역설했다. 즉, 자신이 가담했던 원자핵분열 실험은 발견으로 볼 수 있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폭탄제조는 발명으로 일정한 책임을 회피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학자는 과학적 기술 진보를 과제로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커다란 발전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현대물리학과 양자역학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자세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그것이 발현되는 방향성에 따라 이상적인 미래가 건설되느냐 동반멸망의 처절한 미래가 나타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나 지식인이 아닌 일반 개인이 가져야할 이상적 가치는 어떤 방향이어야할까? 책의 말미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에서의 학회 이후 옆을 지나는 여객선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증기선은 무엇일까? 기관실, 전기 배선 시스템, 전구들을 가지고 있는 쇳덩어리? 인간의 의도의 표현, 인간관계의 결과로서 만들어진 조형물? 아니면 단백질 분자뿐 아니라 철과 전자파를 조형력의 대상으로 삼은 생물학적 자연법칙의 결과? ‘의도’라는 말은 단지 인간 의식에 있는 조형력이나 자연법칙의 반사작용을 이야기하는 것뿐인가?’ 라는 일련의 사고 회로를 통해 진의나 진리의 의미에 대해 심도 있는 생각을 펼친다. 그는 ‘의식’ 이라는 말도 인간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며 이런 개념은 원래는 인간의 영역 밖에서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엄격히 제한하면 동물의 의식에 대해 말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으며 동시에 모호한 개념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이젠 베르크는 항상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객관의 상충과 조화에 대해 고민하며 그것이 어떻게 현실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지 고민한 기존 질서에 대한 이단아이자 철학자였다.
그가 일생동안 해왔던 가치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사회와 여러 종교의 세계관에서 행복, 신의 뜻, 의미 등 아주 다양한 명칭으로 할 수 있다. 궁극적인 가치를 향하는 나침반의 명칭이 다양한 것은 집단마다 의식구조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인간과 세계의 중심질서와의 관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몸담은 현실은 우리 의식 구조에 의해 좌우된다. 앞서 기술했듯이 주관적 영역에 속하는 우리의 의식 구조는 우리가 속한 가족, 사회, 문화, 종교 등의 환경에 복합적인 영향을 받으므로 많은 혼란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역학적 관계에 의해 종종 중심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중심질서가 관철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질서정연한 것을 좋은 것으로 혼란스러운 것을 나쁜 것으로 느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양자론에서는 추상적인 수학적 언어로 훨씬 넓은 영역에 대한 총체적인 질서를 표현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자연적인 언어로 이런 질서의 작용을 진술하기는 어렵다. 즉, 우리는 객관적인 지각과 동시에 비유에 의존해야 하고 모순과 역설을 감수하는 상보적 관찰 방식을 사용한다는 걸 인식하게 된다. 우리가 지각하고 경험하는 외형은 다채롭고 조망하기 힘들지만 그 안에 깃든 중심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영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닐스 보어가 말했듯 진리는 심연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각자의 영혼의 중심질서를 관찰해야한다.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영혼이 나아가고자하는 가치 나침반을 잘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