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은 기원전 145년에 태어나 30대 때부터 한나라 황제였던 무제를 보필하였다. 그러나 기원전98년, ‘이릉의 화’사건으로 가장 치욕스럽다고 여겨지는 궁형(죄인의 생식기를 없애는 형벌)을 받게 된다. 사마천이 사형 대신 궁형을 자처해서 받게 되는 이유는 <보임안서>에 구구절절 설명되어 있다.
기원전 100년 무제는 이광리에게 기병을 주어 흉노를 공격하게 했는데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패배를 인정하기 싫었던 무제는 한나라 초기의 명장인 이광의 손자 이릉에게 보병 5000을 주었는데, 이들은 3만이 넘는 흉노에 맞서 사투를 벌이다 계속되어 증원되는 흉노의 군사에 고군분투하다 결국 포로 신세가 되었다. 끝까지 싸우다 죽지 않고 항복한 이릉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지을 건지 벼르고 있던 차에 사마천이 충정으로서 올린 이릉에 대한 변호를 왕의 친척인 이광리를 모함하고 배신한 이릉을 변호하고 나선다며 역적으로 몰아 희생하게 했다. 사마천은 평소 이릉에 대해 사람 됨됨이가 바르고 지조 있는 선비이며 효성스럽고, 훌륭한 명장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변호는 마땅한 것이었다. 손쓸 도리도 없이 꼼짝없이 죽게 된 사마천은 돈을 써서 죄를 면할 수도 없고, <사기>의 초안은 이미 완성한 상태였기 때문에 죽을 수 없어 궁형이라는 면죄부를 쓰게 된 것이었다.
보임안서는 <사기>와 그것을 지은 사마천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글이며 명언이 많고 대단한 필력으로 유명한 글이다. 이 문장은 지난 수천 년 중국을 대표하는 산문대열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절대문장’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풍부한 감정, 알기 쉬운 표현, 변화무쌍한 문장 형식은 하나의 주제에 맞춰져 있어 탄탄한 구성력을 갖춘다.
사마천과 입사동기인 임안은 익주자사 시절 사마천에게 인재를 추천해달라고 충고했었다. 사마천이 이런저런 이유로 답장하기를 미루다가 임안이 사형을 받게 되어 옥에 갇히자 쓰게 된 자신의 억울한 심경을 담은 글이 바로 이 글이다. 이 글 전반에는 사마천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받게 된 상황에서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궁형을 택한 사정과 삶에 대한 집념, 죽음에 대한 통찰, 비정한 인심과 세태에 대한 울분과 절망이 기세와 자신감으로 극복되어 강렬한 의지로 녹아있다. 자신에게 놓인 상황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역사가로서 살아가려는 의지와 삶에 대한 애착이 돋보였다.
이 글은 크게 다섯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러 사정으로 인해 답장이 늦어졌고, 궁형을 당한 자신의 처지, 왜 궁형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는지, 궁형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도 <사기>를 써야만 하는 이유와 목적을 밝힌 뒤 자신의 당시 상황을 밝히며 편지를 끝맺었다. 사마천은 궁형을 받게 된 자신의 억울한 심정과 충직한 장수들에 대한 황제와 그 충복들의 각박한 대우와 잔인함을 공격했고, 인정과 세태의 비정함, 특히 지배층의 삐뚤어진 기풍에 대한 울분, 절망을 말했다. 또한 자신이 옥중 상황에서 겪은 고통에 대해 인간세상의 가장 어두운 이면으로서 강압정치의 면모를 폭로하고 줏대 없는 지배층에 대한 비분, 절망, 인심과 세태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통해 인식을 한 차원 높였다. 그는 죽음에 대해 통찰하며 생사관을 결정하게 되었고, 본인의 분과 치욕을 개인수준에서 뛰어넘어 <사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삶에 대한 애착과 목적을 향한 불굴의 의지가 절대적 자신감과 정의감으로 드러나 있으며, <사기>에 비해 격하고, 침통하며, 거리낌 없고 힘찬, 그러면서도 기품 있는 이 글을 통해 그의 초인적인 집념을 느낄 수 있다. 글 전체에 사마천의 억울함이 한 글자 한 글자 녹아있어 글을 읽으며 사마천의 심정을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역사가로서의 자세와 삶에 대한 의지, 역사가의 책무에 대해 고찰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에 대해 쓰여 있는 이 글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내가 읽어도 왜 이글이 역사 속에서 칭송받고 인정받고 있는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명쾌했다.
사마천은 역사가로서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꿰뚫어 일가의 문장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죽음을 택하지 않고 구형을 받으면서까지 <사기>를 저술하려고 했던 이유는 살아서는 자신의 진심을 알릴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후세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가탁한 지난 역사의 사건에 대한 글이 전해져 자신의 뜻을 알리고자 함인데, 후세사람인 내가 읽었을 때 그는 그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자신의 훌륭한 필력을 더할 나위 없이 발휘한 이 글은 사마천이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그에 대한 매력을 무한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사마천의 죽음에 관한 깊은 고찰이 드러나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사형에 당하게 되면 사람들이 “죽을만하니 죽었겠지”라고 말하는 것이 자신과 부모의 공적이 부족하여 구우일모가 없어지는 것과 같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릉의 화’ 사건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역설적으로 <사기>를 저술하게 한 원동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이후 그의 생각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변화가 <사기>에 담겼기에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책을 남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처음 사마천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본받을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 수모를 겪고 온전치 못한 신체를 자신의 의지로서 극복해내고, 자신의 운명을 탓하기보다 순응하고 노력함으로써 <사기>라는 위대한 저서를 남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송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후 자신의 여생 전부를 <사기>의 완성에 쏟아 후세에 길이 남을 역작을 남겼고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훼손시킨 자들에게 시위하고 복수하고자 했다. 이 목적은 실제로 달성되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부당하게 박해당할 때 그의 문장을 무기삼아 저항하였고, 그의 문장은 참된 삶과 올바를 가치관을 갖고 사는 지식인들의 무기이자 힘으로써 영생을 얻었다. 가득 쌓인 울분과 억울함을 격정적이지만 절제하며 표현한 문장들은 우아하며 세련됐다. 편지글도 이렇게 훌륭한데 그의 역작인 <사기>는 얼마나 대단할지 궁금하다. 내가 평소에 관심 있게 보지 않았던 것에 이렇게 감동을 받게 될 줄 몰랐고, 내가 이제껏 편협한 생각에 갇혀 살아온 것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