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저는 고등학교 때 지지리도 ‘문학’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에서 문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여쭤보고 오만 시도를 다 해봤지만, 작심삼일이 된 경우가 한 두 차례가 아니었습니다. 일기를 보면, 국어 때문에 재수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까지 했었으니, 정말 고민이 컸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문학’에 대한 고민을 여러분께 터놓는 제 모습을 보시면서 여러분께서는 ‘아, 저 아이는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겠구나.’하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듭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의 예상과 달리 저는 ‘문학’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사실, ‘비문학’보다는 ‘문학’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비문학의 일종으로 여겨지는) 논문이나 교과서를 장시간 읽어나가는 일보다는 시집이나 소설책을 읽으면서 그 속에 담겨있는 이야기들을 잠시나마 따스하게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붙잡을 것입니다.
사실 저도 제가 문학을 왜 더 선호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문학’과 ‘비문학’의 가장 큰 차이점을 무엇일까요? 음, 앞서 말했듯 비문학과 달리 문학에는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비문학’도 사실 ‘이야기’의 한 종류일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듭니다. 해서 문학의 ‘이야기’와 비문학의 ‘이야기’가 각각 담고 있는 것의 차이를 알아본다면, 문학의 이야기는 비문학의 이야기보다 이야기의 주체의 생각이나 감정의 변화 등을 통해 서술되는 경향이 크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 그리고 감정, 아마 저는 다채로운 빛깔을 띠고 있는 그들의 변덕스러움이 가진 매력에 빠져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냉철한 ‘이성’만으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 실행하는 것은 닿지 못할 ‘이상(?)’적인 일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 주인공은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 혹은 ‘이 이야기를 통해 필자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에 빠져들 기회를 주어 스스로의 답을 찾고, 필자의 생각에 공감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력이 저를 매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잠시 의문이 듭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그로서 판단하며 자신이 나아갈 삶의 길을 창조해나갑니다. 생각해보면,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이루어졌을 무수한 ‘생각과 판단, 그리고 창조’가 이룬 많은 것들은 개개인의 삶을 이루기에 앞서 인간의 역사를 이루고, 사고를 한층 더 발전시켜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고 판단하는데 있어 인간이 최우선해야 할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요? 그리고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을 기반으로 해 살아간다고 합니다. 다만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톨스토이가 말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국립국어원은 사랑을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그러나 톨스토이의 ‘사랑’이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하는 마음이라고 단정해보았을 때 다시 의문이 듭니다. 과연 그가 톨스토이가 말한 삶의 기반이 될 수 있을까요? 그 사랑의 주체가 스스로를 사랑의 대상으로 규정한다고 해봅시다. 만약 자기 자신만을 아끼고 귀중히 한다면 사람은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 갇혀 타인과의 협력과 같은 이익을 좇지 못하고 도태될지도, 혹은 이로 형성되는 ‘나의 이익이 가장 중요하지’라는 이기심으로 ‘내가 이익을 얻으면 누군가가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서로에게 손해를 주며 사회의 발전도, 유지도 아닌 도태를 초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더욱 구체화 시켜야 합니다.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아나키즘’을 실현시키는데 있어 사랑의 대상은 보다 ‘보편화’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첫 페이지에 나열되어있는 요한 1서(요한의 첫째 편지)의 구절들 중 하나를 읊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7절
보편화된 대상, 내 곁에 있는 특정하지 않은 대상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 아가페(agapē)를 연상시킵니다.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한 ‘사랑’은 사실 우리말로 의역하자면 보다 포괄적인 ‘사랑’보다는 ‘자비(남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가 더욱 걸맞을 듯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톨스토이의 사랑, 즉 자비는 그를 품어주는 사람들에게 다사로운 빛을 전해주었습니다. 얼어 죽어가는 이(미하일)를 살리고, 양친을 모두 잃은 쌍둥이에게 따스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으며,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걱정으로 죽음이 가득했던 많은 이들의 얼굴에 생기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고 한층 더 무사운 표정으로 옆을 지나쳤습니다. 저는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돌아오는 소리가 났습니다. 쳐다보니 아까 그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까 그 사람의 얼굴에는 죽음이 서려 있었지만 이제 그 얼굴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었고 거기서 저는 하느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49p |
사랑이 깃들어 있지 않은 얼굴, 혹은 자신만을 걱정하는 이의 얼굴에 톨스토이는 ‘죽음’이 서려 있었다는 비유를 했습니다. 아마 요한 1서 3정 14절에서 기인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4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등장하는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자비’를 주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의 편지에서 언급했듯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고 그를 위해 ‘사랑’, 즉 ‘자비’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면에 ‘죽음’이라는 것 또한 남겨두었습니다. 그는 왜 우리에게 ‘죽음’을, 아니 ‘이기심’을 준 것일까요? 그 이전에 ‘죽음’이란, ‘이기심’이란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인간이란 개체에 존재하는 ‘사랑’과 ‘이기심’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을 하나로 정의하기엔 어려움이 따른다는 사실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기심’을 ‘자신에 대한 사랑’이 과장되어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사랑’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것이라 보며 인간은 본래 ‘사랑’을 가진 존재라 주장할 수도 있으며, ‘사랑’은 자신의 만족을 챙기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간은 본래 ‘이기심’을 가진 존재라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둘이 공존한다거나, 인간은 본래 그 둘 모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도 주장할 수 있을 겁니다. 듣고 보면 모두가 일리 있는 주장에 고개만 계속 끄덕이게 됩니다. 누가 옳다고 말하기에 꺼려집니다. 당혹스럽군요. 하지만 저 네 주장 중 어느 것이 옳든 그르든 간에 결론은 같습니다. 이기심이 사랑의 일환이든, 사랑이 이기심의 일환이든, 원래 처음에 존재하지 않았든, 둘이 공존하는 것이었든 간에 우리는 사랑을 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본질이 어디 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지 않을까요?
사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기독교의 성경 구절을 차용했다는 이유로, 많은 분들께서는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주장한 것을 ‘기독교적’ 아나키즘이라 칭하십니다. 물론 톨스토이가 기독교의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주장을 펼친 것은 맞지만, 그의 주장은 기독교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 또한 자비이며, 묵자의 ‘겸애’사상 또한 톨스토이의 주장과 근본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지성들은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남기고 갔습니다.
‘사랑하라.’
사랑하기에 사람들은 그를 그리고, 생각하며, 이해하고, 배려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를 사랑하기에 생각하고, 판단하며,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는 사랑할 수 있기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