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공간과 정치학
사람 건축 도시. 사람은 건축을 만들고, 건축은 도시를 만든다. 반면 도시가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서로 매듭지어진 세 객체를 다루는 책이다. 작가 정기용은 국내대학에선 공예과를 졸업하곤 프랑스로 가 실내건축, 건축, 도시계획을 더 배웠다. 학문을 총망라해 배워서 일까. 그의 글은 대상을 넓게도 보고 좁게도 본다. 특히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줄 아는 차가운 머리를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그다. 이 책은 그가 그간 사람, 건축, 도시에 대해 쓴 짤막한 글 몇 편을 한데 모아 연관성 있게 묶은 책이다.
건축가 정기용은 한국의 건축과 도시에 관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해온 건축가이자 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풍요롭고 올바른 건축문화를 생성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진정으로 요청하는 건축과 도시가 무엇인지, 현재 우리가 생산해내는 건축과 도시는 또한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건축과 도시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건축가나 도시 전문가들만의 전유물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인문학자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개입할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건축과 도시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 역시 인접 학문에 대한 개방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의 관심사는 매우 폭넓게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건축 내부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대상들까지 아우를 수 있었다. 건축에 대한 그의 사고의 지평은 그야말로 부엌에서 우주에 이르기까지, 토담집에서 거대한 전쟁기념관까지, 전통건축에서 최신의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면서 전체적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건축을 바라보는 새로운 지평을 지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전체적인 사유를 하도록 유도한다.
그 중에 나는 도시 파트가 눈에 특히 들어왔다. 우선 개인적으로 나는 도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도시를 만들었고, 계속 도시로 모여 드는가. 바람직한 도시상이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행정가, 건축가, 시민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단순할 것 같지 않은 도시의 성격에 대해 한걸음 다가가고 싶었다. 두 번째, 작가는 인문학적 통찰력으로 건축이야기를 잘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간단한 도식으론 도시에 건축과 사람이 포함되기에 이야기가 한 데 모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도시라는 주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도시와 공공성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작가가 말하길, 도시는 자연현상이 아니라고 한다. 지극히 특수한 역사적 조건과 상황의 산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들은 근현대의 도시들로, 자본주의라는 일정한 역사발전 단계와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서구의 현대도시가 한 세기 반을 지나오며 형성된 고도산업화의 결과이고, 아시아의 여러 도시의 확장은 전 세계적인 경제구조의 재편, 즉 후기자본주의체제의 돌입에 따른 중심과 주변의 재편성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고, 도시에 대한 환상은 살짝 금이 갔다. 하지만 그러기에 오늘의 도시는 이전의 문제를 개선하고 미래의 도시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희망이 생기는 대목이다.
대한민국의 도시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단점은 무엇일까. 그건 전 국토의 획일화라고 생각한다. 해외여행을 좀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같은 나라일지라도 각 지방도시마다 색다른 정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모습의 창출 배경은 권력의 중앙 집중과 자본주의의 독점적 생산방식이 끼친 ‘의지형 개발주의’의 신화다. “하면 된다”라는 신조와 “싸우면서 건설하자”라는 구호아래 밀어붙여온 지난 30년은 역설적이게도 전 국면에서의 파괴를 촉진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전통적 가치의 파괴, 공동체의 파괴, 아름다운 국토의 파괴, 과거유산에 대한 철저한 망각에서만 가능했던 건설. 물리적인 건설과 정신적인 파괴를 동시에 진행시켜온 나날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자율적인 주체로서 역사적 안목을 갖고 이 나라를 운영할 수 있을까? 지방화시대라는 말의 참뜻은 아마도 지방시민이 자율적인 주체가 되어 그들의 공간을 정치적인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질을 진정으로 높이려는 목적을 실현하는 시대를 말할 것이다. 따라서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의뢰하는가가 중요하다.
민선시장들이나 지방자치단체장들은 많은 사업들을 벌일 테고, 그 중에는 분명히 지역공간의 변화를 초래하는 중요한 프로젝트도 있을 것이다. 짧은 임기 안에 과시할 결실을 맺으려 하기 전에 전문영역에 대한 충분한 토의가 있어야한다. 어떻게 객관적이고 적절한 결과를 가져올지 전문가에게 자문하고, 가능한 고집스럽게 전 과정을 원칙대로 수행하는 전통이 만들어져야한다. 도시의 한 모델을 만들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공공성의 회복을 위하여 원칙에 소급하는 것이다. 권위와 지배를 벗어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소중히 여기며 그 고장에 걸맞는 도시를 창출하기 위하여 전문가의 정당한 의견을 프로세스로 고정하는 것. 이것이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공공성 회복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율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