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이 동양 최고의 저술 중 하나라는 점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저자가 그 방대한 양을, 기전체라는 당시는 완전히 새로운 서술 방식을 창안하여 써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그 때 당시의 역사 뿐만 아니라 상고시대부터 당시까지의 역사를 쭉 훑어내려오며 천자부터 개개인에까지 그 스펙트럼을 넓혔다는 것 역시 사기의 다른 사서와 차별화된 장점이다. 저자 사마천의 시선을 통해 고대 중국의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등을 살펴볼 수 있는데, 나는 사마천의 유가에 대한 서술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사기는 개인에 대한 서술을 자세히 하였다. 전체에 속한 개인이 아니라, 개개인이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공동체와 사회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유가를 논할 때에도 창시자라 불리는 공자를 중심으로 맹자, 공자의 제자들에 대해 논하면서 서술하였다.
사기의 프롤로그 격인 태사공자서의 육가요지에 따르면, 그는 유가보다는 도가를 더 높이 샀던 것 같다. 유가의 五倫의 덕을 높이 사긴 했으나 그 가르침이 넓은 반면 요체가 적다는 평가를 내렸다. 한 마디로 '뜬구름 잡는 소리'의 성향이 어느 정도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또 애는 많이 쓰지만 세상에 드러나는 성과가 적기 때문에 가르침을 따르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것은 공자의 삶만 보아도 바로 드러나는 부분이라 반박의 여지가 없는 듯 하다. 반면 도가에 대해서는 그 표현이 난해하지만 가르침을 실천하기가 쉽다고 한다. 정신은 생명의 근본이며 육체는 생명을 담는 그릇인데, 그렇기에 정신과 육체를 먼저 안정시켜야 비로소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선포할 수 있다고 사마천은 말한다. 유가의 덕목들은 힘써 지키면 정신과 육체를 쇠잔하게 하기 쉬우면서도 그 성과가 적은데, 자연스러움과 무위를 강조하는 도가는 적게 수고하고도 성과를 많이 낼 수 있기 때문에 도가를 더 쳐주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사마천의 공자에 대한 평가는 상당하다. 공자 세가 말미에 '그는 과연 성인의 극치라 할 만하다'는, 아마 할 수 있는 한 극찬이었을 평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공자세가 처음에 공자는 그 아비인 공흘이 안씨의 여자와 野合, 즉 부적절한 관계로 낳은 사생아라고 쓰여있다. 공자가 아무리 훌륭한 인물인들 당시의 신분제 사회에서는 그의 출생 단 하나만으로도 그를 깎아내릴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공자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상복을 입고 있을 때, 季씨가 士 계급의 사람들에게 베푼 잔치에 공자가 찾아갔는데 양호라는 사람이 공자를 쫓아냈다는 일화도 있다. 공자 당시 사람들이 공자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비록 그가 출사하기 전의 젊은 나이였지만) 보여주는 한 예시이다. 그럼에도 사마천의 서술을 보면 공자를 거의 롤모델로 삼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아마도 공자의 춘추 저술과 사마천 자신의 사기 서술 사이에 어떤 접점을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공자는 주나라의 예를 회복하자는 원대한 뜻을 품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도를 펼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청렴결백하고 올곧은 태도는 공자당시 어지러운 세상속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어느 한 곳에서도 제대로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대신 제자를 받아들여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이렇게 보면 공자라는 위대한 인물을 한갓 쫌생이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건대->)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한 결과인지,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도에 높은 자부심이 있었다. 예시로, 공자가 조국 노나라에서 한번 더 자신의 뜻이 좌절되자 노를 떠나 陳으로 가던 길에 匡 사람이 공자를 오해하여 그 가는 길을 막았다. 그 때 제자들이 불안해하자 공자가 제자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주 문왕이 죽은 이래, 그 문화의 담당자는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자화자찬은 꼴불견이라지만, 공자같은 인물만큼은 예외인 듯하다. 실제로 그렇게 천하를 주유하며 주나라를 회복하려 애쓴 이가 드물고, 공자는 그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기 때문이다. 사마천 또한 그의 주된 업적, 즉 역사 저술 부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그 역시 자신의 저술로써 어쩌면 묻혔을 수 있는 인물들까지 세상에 드러낸다는 사명감을 가졌을 것이다. 백이숙제 열전의 말미를 빌려 요약하자면, '백이와 숙제, 공자의 제자인 안현 모두 공자를 통해 그 이름이 빛났는데, 이처럼 부러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덕행을 쌓은 사람들이 잊혀진다면 심히 슬픈 일이니, 그것을 세상에 전할 성현'을 사마천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이 사기를 저술했을테니 말이다.
공자는 자신의 도가 세상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에 이름을 어떻게 남길까 걱정하며 당대의 역사 기록을 정리하여 '춘추'를 저술하였다. 말 그대로 후세 사람들이 '공자가 누구야?'라고 할까봐 걱정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정치로써 세상에 도를 펼치는 대신 제자들을 양성하는 것에 힘썼던 것처럼, 말소되지 않는 한 영구히 후세에 전해질 '기록'의 방식으로 자신의 도를 전해서, 언젠가는 그 도가 실현될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썼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춘추'를 중요하게 여겼고 제자들에게 "후세의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든 비난하든 둘 모두 '춘추'를 근거로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마천이 그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사기'를 저술했다고 하지만, 어찌 그 방대한 저술을 하면서 오직 '아버지의 유지를 잇겠다'는 결심만으로 했겠는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기술하면서 사마천 그 자신 또한 저술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결국 후세에 그 뜻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담기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비록 사마천이 특정 사상가도 아니었고, 관철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어 사기를 저술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