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릴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는데, 특히 어떤 분야를 집중해서 다룬 역사를 정말 좋아했다. 과학사를 제일 좋아했었고 어린이용 미술사나 음악사 관련 책도 자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 와서 과학사, 서양음악사는 교양 과목으로 수강해서 들었지만 미술사는 못 들어서 아쉬움이 남았었다. 대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라는 미술사 쪽 입문서를 읽어보기로 했다. 역사서가 늘 그렇듯 정말 두껍지만, 도판도 충실히 실려 있고 용어도 어렵지 않아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학교에서 미술사를 배우면 지루한 용어 속에서 무슨 주의 무슨 기법 하다가 끝나고 만다. 하지만 이 책은 어려운 용어를 애써 나열하지 않고도 충분히 그 당시 미술 사조를 잘 설명하였다. 작가도 미술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라는 내용의 서문에서 ‘미술에 관해서 속물 근성을 조성하는 설익는 지식을 갖는 것보다는 미술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훨씬 좋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나는 사람들이 눈을 뜨는 것을 돕는 것이지 입을 헤프게 놀리는 일을 돕자는 것은 아니다.’라고도 말한 바 있다. 실제로 미술관에 가면 미술 작품에 딸린 설명을 읽고,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정작 작품 자체 감상은 소홀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피카소와 같은 현대 미술가들에 대한 찬사에 길들여져 복잡하고 불분명한 작품을 보며 같이 찬양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을 받기도 한다. 이는 문학작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개인적으로는 난해하고 이상하다고 느낀 작품을 읽고 나서 그런 감상을 솔직히 말하면, 세계문학전집에 들어가 있는 작품인데 오히려 나의 감상이 무시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미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좋다는 작가의 말은 서양미술사에 들어가는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인쇄소에서 교정보느라 꽤 고생했을 것 같은 이 두꺼운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19세기 후반 인상주의 화가를 다룬 장이었다. 한 달쯤 전에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이란 영화를 본 뒤에 흥미가 생겨서 자세히 읽어본 부분이었다. 나에게 좋아하는 화가를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이상하게 바로 떠오르는 이름이 세잔이었다. 어릴 때 읽은 어린이용 미술사 책에서 세잔의 사과 정물화가 퍼뜩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세잔의 그림이 좋다고 생각한 적이 딱히 없어서 꽤 의아한 부분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르누아르나 루벤스의 그림이 좋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왜 바로 떠오르는 화가는 하필 세잔인지 궁금했다. <서양미술사>에서는 19세기 후반 미술의 문제점의 본질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최초의 인물로 세잔을 지목하고 있다. 그가 인상파 특유의 밝은 색채를 유지하면서 고전 시대의 균형과 견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묘사가 있었다. 영화에서도 세잔이 그림을 몇 번이고 던지고 부수며 고뇌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지만, 아무래도 에밀 졸라와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영화여서 빛에 의해 변하는 생트 빅투아르 산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는 일 말고 어떤 것에 대한 고민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재밌는 점은 세잔이 그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정물화의 과일 그릇의 한부분의 일부러 늘려 그리는 등의 고의적인 왜곡을 가하고 원근법을 무시했다는 점이었다. 이런 왜곡은 고흐나 고갱의 그림에서도 드러나는데, 이는 현대 미술의 시작을 알린다고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만화를 포함해서 고의적인 왜곡과 과장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런 작은 왜곡이 엄청난 충격이고 비판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다른 책에서 인상주의에 대해 다루는 부분을 읽고 나면 빛과 색채에 대한 내용만 머리에 남곤 했는데, 여기선 그림 속 균형을 위해 어떤 왜곡이 이루어졌는지,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어떤 붓터치를 사용했는지도 꽤 자세히 다루어서 좋았다. 이렇게 사람들 눈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느끼는 바를 솔직히 표현한 것이 세잔의 그림이기에 내 머리 속에도 인상 깊게 남았나 보다. 어떤 분야의 역사서나 입문서를 집필하는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입문서 특성상 분야 전반적으로 통달하지 않으면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쓰는 책이다 보니 초심자를 대상으로 썼다고 해도 초심자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초등학생 저학년을 가르치는 봉사를 했을 때, 한 아이에게 두 자리 수 뺄셈에서 왜 굳이 10을 빌려와야 하는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연히 10을 빌려 와서 뺄셈을 하는 것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었다. 이처럼 이미 본인에게 상식 수준으로 굳어진 지식을 풀어 설명한다는 것은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서양미술사>는 그런 면에서 참 친절했고, 내가 지식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금 돌아보게끔 하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