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정확히 언제부터 생겨난 건지 모르겠다. 내가 미술사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미술 시간이었다. 중간고사 대비용으로 미술 선생님이 나눠준 프린트 한 장에는 기원전 라스코동굴 벽화부터 19세기 인상주의까지의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ㅡ지금 생각하니 그걸 한 장으로 요약한 선생님도 대단하신 것 같다ㅡ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것을 다 외웠다. 몬드리안과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지는 못했어도 차가운 추상, 뜨거운 추상하며 외웠다. 그래도 그것을 특별히 좋아한 건 아니었다.
미술은 좋아했다. 나는 늘 무언가를 적고, 그리고, 꾸미고 싶어했으며 남이 그리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았다. 엄마는 그런 내 취향을 알아보고 미술학원에 보냈다. 학교에서도 시험까지 즐긴 것은 아니었지만 미술시간은 일주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업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자율형 사립고였던 학교의 재량에 따라 미술과 음악 시간이 각각 한 학기로 줄어들고, 2학년 때는 완전히 없어졌다. 입시 미술이 아닌 이상 수험생에게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것은 사치였다.
그러다 수능이 끝나고 이 책을 읽었다. 엄마의 책꽃이에 있어서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나를 미술학원에 보냈지 본인이 적극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책의 3분의 1쯤에 책갈피가 꽂혀있었다.
곰브리치라는 이름은 역사관에 대한 모의고사 기출문제 지문에서 E.H.카와 함께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저서 <곰브리치 세계사>가 있지만 이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지친 그가 책 편집자였던 친구의 제안을 받아 만든 '어린이를 위한' 역사책이다. 실제 그의 전공은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미술사학과 고전건축이다. 어린이와 같이 호기심은 많지만 전문지식은 깜깜한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취미는 본 전공에서도 발휘되어 이 책, <서양미술사>가 탄생했다. 서문에서 그는 '이 책은 아직 낯설지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졌다.'고 밝히고 있다. (9쪽) 그러나 어린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했던 <곰브리치 세계사>와는 달리 이 책이 상정한 독자는 그보다는 수준이 높은 듯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700쪽에 가까운 분량(한국판)이며 미술이라는 범주를 건축, 회화, 조각으로 나눠서 모두 설명하려는 시도가 약간 버겁다. 책을 읽는 내내 건축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건축은 비중이 높았다. 또 작가가 전문 용어를 최대한 줄이고 진정한 걸작들로만 엄선했다고는 했지만 워낙 많은 지역ㅡ제목을 '서양'미술사로 한정했음에도 불구하고ㅡ과 인종, 계급의 미술을 다루기에 알아서 끊어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방대한 범위에서 비롯된 시간과 분량의 문제이지 내용적 면에서는 꽤 친절하게 쓰인 책이다. 미술사는 역사와 다르다. 역사는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미술사는 과거에 대한 의식 없이는 쓰이지 않는다. 물론 특정 시기의 세계상은 이전 시기의 그것과 반드시 차이를 갖기 마련이지만 미술사에서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미술사는 이전 시대의 화가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땅에 대한 개척사다. 좋은 미술사서는 그 개척의 한 단계 한 단계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이전 단계의 미술에서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간직했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역시 이전 미술과의 비교에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앞의 도판을 보기를 요청한다.
하나의 미술 작품의 가치를 만드는 이로는 창작자와 감상자, 두 사람이 있다. 내용 비평의 세계를 열었던 헤겔은 전자를, 형식 비평을 정립한 칸트는 후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미술사에서 주인공은 창작자인 화가다. 구술을 할 때 감상자는 창작자만큼 구체적인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롭다 못해 파격적인 미술들이 등장할 때마다 충격을 받고 야유를 보내던 감상자들의 반응이 없었더라면 미술사적 걸작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곰브리치는 둘의 상호작용을 잘 이해한 것 같다. 당대의 감상자, 예컨대 화상이나 대중의 이야기가 적당히 소개되고 있다. 또한 그는 창작자들의 이야기인 미술사가 결국은 감상자들을 위한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한 논의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림을 보도록 만들기 때문에 그림을 많이 보면 볼수록 이전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장점들을 보게 된다. 우리는 각 시대의 미술가들이 이룩하려고 고심해온 그런 종류의 조화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이러한 조화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풍부해질수록 그만큼 더 그런 그림들을 감상하는 것을 즐기게 될 것이다.(36쪽)' 이 점은 오르세 미술관에 가기 전 인상주의 공부를 한다던가, 레오폴드 미술관에 가기 전 에곤 실레의 전기를 찾아본다던가 하여 그림을 한층 오래, 재밌게 볼 수 있었던 나로서는 꽤 공감이 되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창작자만이 참신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비평가들이 정립해온 단어를 써가며 전혀 예쁘지 않은 그림 앞에서 '대단히 흥미있군'이라고 젠체하는 태도를 그는 경계한다. <서양미술사>와 같은 책이 그러한 태도의 발현을 낳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는 미술의 감상자인 독자에게 '그림 속에서 새로운 발견의 항해를 감행'하기를 부탁한다. 여기서부터는 처음 입문하는 자의 수준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미술사에 제법 흥미를 갖게 된 내가 여러 미술사 수업을 교양으로 듣고 다른 미술사 책들도 찾아보기 시작한 것도 그러한 항해의 기술을 체득하기 위해서다. 그러고보니 엄마가 나를 미술학원에 보내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미술사책을 제공한 것은 미술의 항로로 들여서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어 물어봤다. "엄마, 나 미술학원 왜 보낸 거야?" "미술학원? 내신 미술 성적 잘 받으라고." 아, 철저히 현실적인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