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바라본 전쟁과 이를 경험한 내면의 모순과 충동
『소년 H』
세노오 갓파 지음 / 오근영 옮김 /페이퍼로드 刊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우리 과에 한 학기에 일본인 한두 명은 꼭 들어왔었다. 신기한 건 같은 이십대인데도, 정치사회적인 면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우익적인 성향이 강했다는 점이다.
흔히 이십대에 고민해보는 타자(타국)의 역사에 대한 열린 태도, 자국 역사에 대한 비판적 입장,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려 등을 그들과 공유하기란 어려웠다.
그때부터 일본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됐다.
그런데 최근 그런 편견을 깨주는 책을 만났다. 세노오 갓파의 자전적 소설인 『소년 H』(전2권)이다.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역사에 완전히 무관심해도 이 책은 충분히 ‘재미’만으로 독자를 끝까지 끌어갈 능력을 지녔다.
지난해 소설가 황석영이 자신의 십대를 회상한 『개밥바라기별』을 출간해 호응을 얻었지만, 감히 말하건대 『소년 H』는 그보다 시대적 풍경과 자아의 내면을 반추해나가는 것이, 내가 보기엔 훨씬 탁월했다.
일본의 내로라하는 소설가들이 『소년 H』를 읽고 질투를 느꼈을 만큼, 본업이 무대미술가인 갓파의 입담은 뛰어나다.
하지만 핵심은 역시 책 전체를 관통하는 “소년의 시각으로 바라본 전쟁과 그것을 겪어내는 내면의 모순과 충돌”에 있을 것이다.
외국인 거류지가 몰려 있던 고베라는 항구도시에서 성장한 소년 H는 그 시절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세계를 인식했던 아버지와, 한없이 착하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 갇혀 융통성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전쟁의 소용돌이를 몸소 체험하며 자아를 형성해나간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된 H는 애초에는 발랄한 소년이었고, 그런 흔적들이 소설 곳곳에서 유쾌하게 드러나고 있지만, 삶을 적셔오는 전쟁의 심각한 아이러니로 그의 자의식은 예민해지고 그러면서 조금씩 변하고 성장해간다.
전쟁을 치르면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다.
큰 장애가 없으면 군대에 끌려갔고, 또 민방위훈련과 교련 수업으로 무장을 했다.
확실히 당시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전쟁의 승리를 바라고 있었다.
소년 H는 날카롭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오합지졸인 일본 군대, 천황의 쓸쓸한 뒷모습, 교련 선생의 두려움과 고독함 등을 읽어내고 있다.
전쟁에 반대했고, 내심 일본이 패해도 아무 상관없었던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나 스스로도 ‘비非국민’이었다.
물론 그 자신도 모르게 일본의 승전에서 오는 부스러기를 받아먹기 좋아하고(승전하면 학교에서 맛있는 간식거리를 나눠주는 등), 일본이 이기길 바라는 마음이 불쑥 찾아들 때도 있었지만, 전쟁이 자신을 둘러싼 인간관계와 삶의 소중한 풍경들을 하나하나 폐허로 만드는 과정을 겪은 그로서는 그 전쟁을 주동한 자신의 모국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내내 일본인이 아닌 ‘비국민’으로서 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지적 염세주의가 아니라, 결국 그를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선택으로 내모는 절실한 고통이었다.
결국 H가 바라본 일본이나 그 국민들은 ‘인간은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할 근거가 약할수록 국가나 종교, 인종의 우월성을 내세우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H의 주변 사람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두 전쟁의 황폐함 속에서도 천황 폐하의 우월함을 신앙처럼 믿고, 일본인은 끝끝내 고개 숙이지 않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들은 기댈 곳 없고, 국가가 없으면 그 자아도 버틸 수 없는 존재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을 경우 자유가 주어지면,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나치에 기대어 자신의 자유를 복속시킬 수도 있고, 또 국가의 이념이나 사회의 체계에 자신의 자유를 쉽게 내주고 현실에 편승하여 살아갈 수도 있다.
일본인들이 천황 만세를 부른 것도 그들이 자신의 자유를 국가에 내줬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이 소설은 오늘날 20대 대학생들에게 역사에 대해 한번 되돌아볼 만한 기회를 줄 것이다.
이은혜 | 글항아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