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9
'소크라테스의 변명'
생각을 정리해야지 싶을 때마다 찾는 책이 있다.
'도덕경'이라던가, '표백' 이라던가, '경영통계'라던가.
지긋지긋하게 애착이 가는 책도 있고, 혹은 페이지 구석에 끄적여 놓은 것을 보며 그새 얼마나 생각이 오만해졌는지 돌이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언제고 읽어도 묘한 긴장감과 반성을 안겨다 준다. 고등학교 때, 군대에서, 그리고 지금에 달하기 까지 철학자가 되고 싶어했던 내 순간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소 지저분해지긴 했지만, 그 고대의 철학자와 이렇게 긴밀히 이야기할 수 있는게 또 어디있는 기회겠는가.
소담론은 철학적 담론과 사회의 선택 정도로 거창하게 시작하고자 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번 탐독 후에는 소크라테스의 사고관이 그리 탐탁치 않았다는 의미다. 주로 '변명', '크리톤'을 다루며 제일 친애하는 부분인 파이돈을 짚으며 이야기나누고자 한다.
시대의 가치관, 혹은 사상은 그 시대의 필요가 선택한다는 말이 있다.
왜 인본주의냐고? 전후 세대에 노동력이 귀해진 시기에, 동등한 인간 권리를 내세우며 노동력으로 편입시키기 위해서다.
왜 아동을 교육시켜야 하냐고? 아이를 보편적으로 아끼고 아동 인권을 위해서가 아니다. 시대에 필요한 노동자원으로 훈련시키는게, 각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지식이 많아지면서 사회화가 국가로 이전된 것의 연장으로 충분히 설명가능하다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또한 잉여 자원의 사회로의 재투자로 이끌어 내기 위한 모델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고대의 중상주의나 중농주의 등 각각의 사회적 체계, 경제적 체계 또한 그 시대의 적합함에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뭐가 더 낫고 못하고, 옳고 그르고가 아닌 그냥 그 시대에 필요하고 적합한지가 더 합당한 논점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철학자나 종교인 또한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고 생각한다.
4대 성인으로서 이 소크라테스를 접했는데, 이 분은 참 모호하다.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와 같은 기라성 같은 조직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신이나 신성에 대해 명쾌히 답을 내려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구세주, 선지자로서 업적이 뚜렷했나? 그것도 아닌거 같다. 그리스에서 본인의 논지를 설파하다, 본인의 죽음을 청구하는 재판에 수긍하고 죽음을 선택한 철학자일 따름이다.
그럼 왜 그는 우리에게 있어 보다 중요했어야만 하는가?
타 성인들은 각각의 주된 관념에 의해, 종교적 특성에 의해 선택받고 살아남은 이들이라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만큼 굳건히 사회의 선택을 받았는가 질문하면, 의아하다. 소크라테스교를 외치며 수양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잖은가. 물론 후대에 끼친 철학적 사조나 분파, 플라톤에 끼친 영향등이 있긴하지만, 이는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 현대의 과학적 사고의 전개에서, 소크라테스와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었다. 무지와 인지, 이 두가지 관념이 그의 논설에 깊게 녹아있다.
소크라테스는 죄인으로서 스스로를 변명해야 했고, 결국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크리톤은 탈출하여 다른 도시국가로 떠나자고, 삶을 이어나가고자 설득하지만 옳고 그름, 국가와 개인 등 다양한 논지로 살리고자 하는 크리톤의 열의를 가라앉힌다. 앞선 변명의 부분에서, 그는 그의 무지함을 통찰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현명한 이들을 찾아다녔음을 논한다. 소크라테스는 결국 그 모두가 무지하고, 스스로 무지함을 아는 그 자신이 보다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에 가까우며, 오직 신만이 현명하다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의 논점은, 너무도 보편히 전파 되었기에 그 이상 말을 나누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래서 크리톤 부터 파이돈까지 이르기에, 소크라테스는 질문하며 대답하고 또 논의를 진행시키는 - 산파법을 통해 우리에게 헤아림을 보여주지않던가.
그러나 보다 내 마음을 앗아간 부분은, 크리톤의 이 대목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길,
"그러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기로 하네. 이 문제를 질문의 형식으로 제기하고 싶네.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인정하는 일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을 속이고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
크리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해야 하네."
사람의 죽음을 결정하는 재판에 진 철학자의 말 치고는 말이 모호하다.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인정하는 일을 해야 하는가. 이건 마치 그 스스로가 삶의 끝머리를 잡을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긴 것 같다. 사람에 따라, 철학자에 따라 무엇이 옳다고 '인정'하는지가 매우 상이할 것 아닌가. 심지어 뒤의 파이돈에서 이어지는 영혼의 논지에서는, 이데아나 본질을 논하며 옳고 그름이 다소의 절대성 - 혹은 신성을 획득한 것처럼 말을 했음에도, 소크라테스는 개인의 판단, 인지의 여부를 간과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판단하는지, 내가 관측할 수 있는지를 가져옴으로서, 오늘날 현대 과학에 근간 되었던 무지로의 회귀와 관측의 중요성, 두가지가 완성 되었다.
과거 중세시대를 과학적 암흑기라고 비평함에는 간단한 입증이 있다. 모르는 것은 신에게 물어보면 되고, 그 신의 뜻은 사제가 대신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 사제는? 보다 고대의 원전이나 신의 계시에 근간하여 답을 알려준다. 모든 무지는 신에게 물어봄으로 해결되기에, 무지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제도 모르면 교황에게 찾아가면 되겠지. 델포이의 사제가 모르면 다른 신을 섬기는 사제에게 찾아가보던가.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무지를 그보다 더 고대에, 조심스럽게 가져와서 말했다. 자,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 그러니 근처 현상을 비교해보며 알아보자. 소크라테스는 뒤의 영혼에 입증과 관해서도, 다소 아쉽긴 하지만 수학적 공리나 불멸성, 하모니 등을 논하며 끝임없이 논증하려든다. 이걸 보고 있자니, 그 과학적 담론의 치열함이 훨씬 후세대인 나에게도 생생히 와닿는다. 이 형상들을 말하고자 얼마나 많은 사고적인 실험과 비교를 했어야 했는가?
그런데 살짝 위험함이 느껴진다. 신은 완벽하고 모든걸 알고 있는 존재일텐데, 왜 신탁은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하다 했으며 왜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의심해야했는가. 사제가 잘못한 것일까? 신탁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여기서, 관측자가 다시 조명되며 우리는 철학에서 과학적 사유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사실이 관찰자라는 것 또한, 과학에서 생각보다 근래에 재조명된 문제다. 뉴턴식 역학에 따르면 대부분 물체의 역학적 상태는, 누가 봐도 명확하지 않은가. 질량이 m인 물체가 속도 v로 움직이고 있다. 속도가 증가하고 있네? 가속도 a가 있구나. 물체의 가속도는 힘을 질량으로 나눈 값이다. 그런데, 이는 보다 작은 입자들을 관측하기 시작하며 문제가 생겼다. 어떤 물체의 상태와 속도를 동시에 특정할 수 없게 되었는데, 관측을 위한 과정에서 가하는 에너지가, 물체의 역학적 상태에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빛으로 쏘아 보거든 그 에너지를 받아 속도나 위치 둘 중 하나가 변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불확정성 원리라는 또 다른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
소크라테스의 앞선 말을 다시금 입에 머금어본다.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해야 한다. 사실 인간은 신의 뜻을 잘못 해석할 수도 있다. 신이 소크라테스를 만들며, 다른 인간을 계몽하고 선도할 줄 알았는데 엄한 곳에서 저렇게 죽을 줄 모를 수도 있지 않은가. 적어도 소크라테스는, 스스로의 관측자적 관점에서 보다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한 것일 따름이고, 그럼으로서 오늘날까지 남을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신성 또한 의심할 수 있는 무지의 관점과 신의 뜻 마저 다양케 해석하는 관측의 중요성을 우회하여 보여주었으니까. 앞선 4대 성인 중 누가 이렇게 과학의 시대에 적합한 사고관을 제시했는가? 과학의 종교화는 소크라테스에서 그 흐름을 이어온 것인다. 종교화보다 사상화가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지나가게 되는 영혼에 대한 담론.
일전에 정의란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를 읽고자 비교하며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한데, 그 사이에 다가선 책들이 오늘은 다른 문장을 통해 내 눈을 띄여 준다. 예전에 읽을 때만 해도, 심미아스와 같이 '하모니' 에 대한 담론에 마음을 한창 뺏겼다. 그런데 다시금 읽어보니, 소크라테스는 보다 흥미로운 말을 했었다.
"친애하는 케베스, 만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죽고 죽은 다음에는 죽은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결국 모든 것은 죽게 되고 산 것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거야 이 밖에 다른 결과는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살아 있는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나오고 또한 이 다른 것들도 죽는다면,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게 될 것이 아닌가?"
좀 친숙하다. 우주론을 말할 때 빅 크런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열역학 2법칙에 따른 종말하고 매우 유사한 관념아닌가? 소크라테스는 삶과 죽음 사이의 가역적인 변화를 신을 믿던 만큼 쉽게 합의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자원을 사용하고 사용하다보면 비가역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엔트로피는 증가하며 언제고 우리는 멸망하겠지.
그럼에도 만약 소크라테스가 신성을 부정하는게 죄악이 아닌 시대를 살았거든, 수십세기가 지난 뒤에 얻은 결론을 먼저 얻었을 것임에 의심치 않는다. 정보의 사용, 자원의 활용, 열역학적 평형 등 우리가 저 결론을 얻기까지 얼마나 무수한 담론을 거쳐야 했었나. 단순히 생과 사라는 주제만으로 저 명제가 단순히 도출됨에, 다시금 감탄하게 된다.
다만 그럼에도 파이돈에서의 아쉬움은 수학적 공리와 하모니-하프의 비유와 같이 상이한 관념이 서로를 설명하기 위해 대비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 보기에 어색할 뿐이고, 그 사이에는 지금도 돌이켜볼만한 사유가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
소크라테스의 사고 전개 방식은, 결국 오늘날의 과학에 있어 선택 받아야 하는 중요한 방식이 아니었나 생각든다. 사회가 정녕 철학자를 선택한다면, 그 여느 성인보다도 우위를 점해야 함이 맞지 않을까.
그럼에도 아쉬움과 의문은 남는다. 철학자의 완성과 철학의 완성은, 그토록 차이가 큰 것일까?
파이돈에서 보인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다소 비겁하다 생각한다. 그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사유를 통해 철학자로서의 완성은 충분히 입증을 했다. 사후의 가능성이나, 보다 순수한 영혼으로서 육체가 가져다 주는 오류는 피할 수 있겠지. 하지만, 케베스가 처음에 제시한 의문에 답이 된 것인가? 보다 현명하고 선한 이로서, 지금 살아 있는 이들에게 보다 선함과 옳음을 논할 기회를 저버리고 혼자 죽음으로 나아감은 과연 옳은 일인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불교에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가 있다며, 스스로 부처에 도달할 것인지 중생을 구원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구분이 있다고 들었다. 죽음의 재판을 겪고 난 소크라테스가 과연 이런 논점을 마냥 회피했어야 했을까? 최후의 모습은 죽음에 의연히 맞서는 늙은 철학자보다도, 세상 풍파에 지쳐 세상과 거리를 두려는 늙은 은둔자의 모습이 보임은 괜한 오해였을까.
지식은 상기되는 것이라 말하던 오래된 철학자에게, 찬사를 바치며 책의 되새김을 마치고자 한다. 다시 다른 책을 읽고 또 다른 생각이 그득할 때,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새로운 가르침을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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