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의 화신,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사형당했다. 그러나 그는 무자비한 독재자가 휘두른 폭력이 희생자이거나, 죄질이 고약한 범죄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민주주의와 법치 아래 이루어진 재판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아테네는 폴리스, 즉 도시국가로서 견고한 정치 체계를 갖추고 직접민주주의가 시행되던 민주정치의 요람이었다. 안정적인 국가와 정치 덕분에 아테네의 시민들은 학문과 문화에 몰두할 수 있었고, 이는 다양한 도시의 지성인들을 아테네로 불러모으는 기반이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던 당시의 애지자 중 하나였다. 특히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진리를 인간 안에서 구하며 자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닦으려고 노력했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다루는 모든 물음이 영혼과 그 불멸에 관한 문제로 귀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영혼의 산파술이 불리는 특유의 화법으로 자신이 만난 사람에게 무지를 깨우치게 하여 자신의 영혼을 돌볼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여파로, 소피스트를 비롯한 반대 세력과의 재판 끝에 독약을 받게 된다. 비록 그의 육체는 당시에 사형을 당했지만, 그의 철학은 플라톤에 의해 전승되어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그의 영혼은 참된 철학자의 영혼으로서 죽지 않고 가장 고귀한 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화법과 행동방식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는 산모의 출산을 돕는 산파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산파’로서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지혜를 이끌어내는 화법을 사용한다. 산파술은 문답법이라 불리기도 하며, 적극적인 경청과 비판적인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이 화법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논점에서 모순을 지적한다. 산파술은 기성 지식을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이나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자기비판을 유도한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강조하던 상기설을 배경으로 한다.
상기설은 지식은 상기로부터 비롯된다는 이론으로, 우리가 현재 상기할 수 있는 지식은 과거에 배운 적이 있었다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어떠한 대상을 감각으로 접할 때, 그 사람은 그 대상에 대한 지식만을 상기할 뿐이 아니라 더불어 그와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가진 대상 또한 상기하게 된다. 상기는 대체로 시간이 흐르고 부주의로 인하여 이미 잊었던 것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이를 활용하여 뒷부분에서 다룰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 설명한다. 우리는 ‘본질’과 본질이 드러난 일개의 ‘대상’을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나무와 돌이 같지 않음’에서 사용되는 ‘같음’과 다른 차원의 개념인 ‘같음 자체’라는 예시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이데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무나 돌 등에 드러난 낮은 차원의 ‘같음’과 이데아로서의 ‘같음 자체’에 대하여 구분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식을 얻게 된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상기설을 도입하여 영혼의 불멸을 설명한다. 육체의 탄생 전에 이미 영혼이라는 존재가 있었고, 그렇기에 우리는 이데아, 즉 본질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태어난 후 감각으로 인하여 망각한 지식을 산파술로 상기하여 본래 갖고 있던 지식을 회복하는 것을 학습이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자신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목소리는 그가 하려고 하는 일을 금지하기만 할 뿐 결코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목소리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정치를 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했고, 삶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예술을 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형을 앞두고서 목소리가 사형을 당하지 말 것을 지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도 탈옥을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다이몬’, 즉 유령이라고 칭해지기는 했지만 사실은 인간의 양심에 가깝다. 당대의 지식인들과는 다르게 소크라테스는 이 양심이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가혹한 자기부정을 할 수 있었고, 정의와 덕의 근원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받은 질문과 그의 대답
소크라테스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와,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당시의 소피스트들과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고발당한다. 그리고 법정에서의 변론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선고받은 후, 형을 앞두고서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델로스로 보내는 신성한 배의 출항 전 날이었기에, 사형 선고를 받은 후 형의 집행까지 약 한 달의 시간이 소크라테스에게 주어졌었다. 형을 앞두고 소크라테스는 친구들에게 탈옥 권유를 받기도 하고, 도무지 죽음을 앞에 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대화를 나눈다. 이는 크게 소크라테스가 받은 세 개의 질문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은 법정에서 이루어진 재판과 그의 변론과 관련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왜 무고한가? 소크라테스는 앞서 거론한 것처럼 무신론자라는 이유와 청년들을 교란한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그의 오래된 고발자들에 대한 변론을 시작한다. 그는 우선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신전에서 아폴론의 무녀에게 신탁을 구한 이야기를 한다. 카이레폰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고, 소크라테스라는 답을 얻는다. 그 사실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자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을 찾아 출정을 다니게 되는데, 세간에 이름이 난 현자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지혜는 신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오직 그것을 깨달은 사람 중 자신이 있었다는 이유로 이러한 신탁이 내려졌다고 결론짓는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신이 내린 의무를 수행하는 차원에서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논점을 통하여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신론자가 아님과 더불어, 그 과정에서 청년들이 재미를 느끼고 따른 것이고,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정적을 만들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 다음으로, 소크라테스는 재판의 기소자인 멜레토스에 대하여 변론한다. 멜레토스와의 공방에서 그는 산파술을 통하여 멜레토스의 주장에 모순이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스스로를 ‘신의 등에’라 칭하며 자신의 담론이 결국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소크라테스가 두 번째 받은 질문은 크리톤과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왜 그는 탈옥을 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에서 국가와 개인, 법과 정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국가는 개인의 탄생을 돕는다. 또한 개인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따라서 국민은 국가에 소속된 국가의 자녀이며,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은 만큼 그 존속을 위하여 실행해야만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만약 국법에 의심이 든다면 시민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고,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에는 이주를 할 권리가 주어졌다. 이에 따라 아테네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고, 법에 관심을 가져본 경험이 없고, 70년이 되도록 아테네에 계속 머물렀던 소크라테스는 국가를 따르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따라서 만일 그가 탈옥을 하여 다른 도시로 간다면, 그는 법의 파괴자로서 그곳의 정부에게 경계를 받을 것이고, 정의와 덕에 대한 본인의 영혼을 더럽히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탈옥 권유를 거절하고, 악행을 한 사람이 아닌 무고한 몸의 피해자로서 저승에 닿으려 했다.
소크라테스가 받은 마지막 질문은 영혼의 불멸이라는 그의 총체적 철학의 출발점과 관련이 있다. 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기꺼이 맞으려고 하는가? 대답에 앞서 그는 참된 철학자에 대한 담론을 구성한다. 철학자는 최대의 선을 좇아야 하며, 죽음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죽음을 통해 영혼이 육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쾌락, 혹은 먹고 마시는 쾌락 등의 육체적 쾌락은 세속적인 것으로 참된 철학자는 이것들을 멀리 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영혼의 수양에 관심을 갖고, 되도록이면 육체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한다. 또한 정신이 육신에서 떠나 가능한 한 육신과 관계하지 않고 참된 존재만을 갈망할 때, 최상의 사유가 가능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오직 순수한 영혼만이 참된 존재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육체의 방해로 영혼이 순수한 지식을 향유할 수 없다. 그렇기에 참된 철학자에게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 곧 해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화에 참여한 제자들은 여전히 죽음이라는 불확실한 어둠으로부터 두려움을 느낀다. 이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존재의 대립성에 대하여 설명하며, 죽은 자의 영혼은 어떤 곳에 있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또한 앞서 언급된 상기설과 연관 지어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지식을 함유하는 것으로 보아 영혼이 불멸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죽음을 통하여 진리에 가까워지고 마침내 자유로워진다고 말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운명적으로 그에게 닥쳐온 죽음이 신의 부름이라 생각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왜 목숨을 잃어가면서까지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을까? 아가톤의 잔치에서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참석자들은 돌아가며 에로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한다. 에로스는 사랑을 관장하는 신으로 아프로디테의 생일에 궁핍의 여신 페니아와 풍요의 신 포로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결핍된 대상을 얻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그는 예언자 디오티마의 말을 빌려 에로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애지자이며, 인간에게 절대적 아름다움과 접촉하도록 함으로써 참된 선을 알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사실 현대의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말 중에는 반박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그의 화법인 산파술은 이분법적이고 일방향으로만 대화를 이끌어간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분명 그가 목숨까지 잃으며 지키려 했던 진리는 결코 경직되어 있지 않았다. 에로스가 보여준 절대적 아름다움 덕분에 인간이 진리 자체에 닿는 꿈을 꿀 수 있었듯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사람들에게 무지를 깨우쳐 주고 그들 안의 진리를 이끌어내어 스스로가 영혼을 돌볼 수 있도록 힘썼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 할 참된 선을 전해준 에로스의 화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