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쁘지 않아.” “쉽지 않아.”
혹자는 ‘이 문제는 어려우니까, 다른 방법은 어떨까?’ 하는 침착한 태도로 이 말을 되뇔 수 있다. 그 말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지와 함께여야 한다. 그런데 만약 “나쁘지 않다.”고 정의한 문제를 나쁘지 않은 상태로 끝내 버리면 우리는 그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앞으로 다가올 나쁘지 않은 현상들과 쉽지 않은 문제들은 무거운 한계로 다가오지 않을까?
결국 “나쁘지 않아.” “쉽지 않아.”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안일함으로 번질 수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은 일에 관계된 다른 사람들의 편함을 도와주지만, 일을 훌륭하게 끝내려는 욕망과 훌륭한 결과를 구름 위로 날려버리게 한다. 결국 위대함과 훌륭함으로 도달하는 길을 막아 버린다. 한 번 일을 안일하게 처리하기 시작하면, 완벽을 추구하는 믿음은 금세 깨져 버린다. 주변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을 돌아보자. 그 사람들은 편함을 추구하는가, 위대함을 추구하는가?
혹자는 그 사람이 “여가를 엄청 즐기던데요.” 하며 편하게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여가 즐기기와 나태함을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건 큰 실수다. 여가를 즐기는 사람은 삶에서 위대함을 추구하고 있는 동물이다. 나태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가를 즐기는 사람은 일에서도 위대함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도 위대함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은 인생 전반에서 위대함을 추구한다.
직업 선택의 근거 : 철학의 중요성
하지만 이 길은, 책에는 나오지 않는 답을 찾고 전혀 다른 종류의 숭고함을 발견하며, 고통받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할 수 있는 길이었다. (64)
단기적으로 바라보면 칼라니티의 20대가 아주 위험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문과 쪽에 분명히 재능이 있었다. 그런데, 진로를 틀어 의대로 진학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에게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아마 만류하고, 거부하고, 만류하고, 거부하다가 집을 떠나거나 뜻을 굽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우리는 칼라니티가 의사를 선택한 이유가 돈이나 명예가 아니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문학과 철학을 포기한 이유는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시켜 줄 직접적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쌓아온 철학을 치열하게 느끼고자 의학을 선택했다. 철학이 바탕이 된 직업 선택이었기에 그는 외과 의사를 소명 그 이상으로 생각했다.
책에 나오듯 외과는 의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분야이다. 죽음을 본질적으로 다루는 게 버겁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몸이 힘들다. 의사 입장에선 비슷한 돈을 버는데 굳이 외과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작년에 방영한 <그것이 알고 싶다> 권역외상센터 편을 보면 외과의 현실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지난해 말 북한 병사가 JSA를 탈출한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수술을 집도한 사람은 바로 이국종 교수였는데, 수술 진행 경과를 발표할 것이라 예상하던 기자회견에서 그는 의외의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한다. 주제는 ‘외과를 살려주세요.’ 이국종 교수가 속한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는 다른 권역외상센터들에 비해 사정이 나은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한 달에 응급대기 당직을 13번이나 섰다. 다른 의사들도 최소 11번이었다. 외과를 전문적으로 수련하는 센터에는 외과의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어들이지도 못한다. 이국종 교수는 본인이 센터장이라 하더라도 권역외상센터를 싫어할 만하다고 했다. 병원의 1차적 목적은 환자가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치료하는 데 있지만, 경영을 위해선 돈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역외상센터는 24시간 운영되는 특성 때문에 매년 만성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만큼 외과는 돈을 벌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근무 여건도 어려운 곳이다. 이국종 교수는 결국 과로와 스트레스로 왼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이다.
외국은 사정이 나은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책에도 의사 지망생들의 외과 기피 현상은 확실히 드러난다. 그는 대학원 4학년이 되자 동료들이 하나둘씩 방사선과나 피부과로 전향한다고 적었다. 다른 동료들은 ‘조금 느슨한 삶, 하지만 여가를 챙길 수 있는 삶’을 원했고, 외과는 그 기대를 충족해주지 못했다. 칼라니티는 뜻을 굽히지 않고, 신경외과를 선택한다. 대체 왜? 우리는 어떤 근거로 현재의 삶을 선택했는가? 우리의 장래 희망은 어떤 가치에 맞춰져 있는가? 칼라니티의 직업 선택 과정 스토리가 말해 주는 핵심질문이다. 사실 나는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 부끄럽다. 경제학을 선택한 이유가 가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장래희망은 3년 연속 스포츠 부 기자였다. 경제랑은 어떤 접점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경제학을 선택한 이유는 기자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었다. 인과관계를 좀 더 명확히 밝히면, 경제학과를 선택해서 기자를 하지 않을 가능성을 만들어 냈다. ‘경제학과를 가면 기자를 안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전직 기자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면, 그 당시의 내가 얼마나 가치가 아닌 연봉과 위상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대화 도중 전직 기자는 화를 냈다. 그럴 거면 기자를 왜 하냐고 했다. 나는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자수성가형 인간이 될 수밖에 없어서 실상이 궁금했다고 했다. 그 말에 전직 기자는 흥분을 가라 앉혔다. 자수성가형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나의 숙명은 사실이었고, 현재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말은 거짓에 가까웠다.
대화 당시 나는 가치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컴퓨터공학과 복수 전공을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군대에서 20개월을 보낸 지금, 나는 다시 기자를 희망 직업으로 삼았다. 물질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자수성가형 인간은 항상 물질의 중요성을 마음에 지니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건 중요성에 불과하지 인생 전체가 되어선 안 된다. 다시 신문기자로 돌아온 근거는 ‘벅참’이 가슴에 있기 때문이다. 취재하고, 글 쓰고, 여러 삶의 군상과 부딪히는 현장의 삶.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이었다. 칼라니티처럼 깊은 고민은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공부는 몇 년 이상 탐구해야 가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칼라니티는 영문학과 철학을 깨부수듯 공부했고, 확실한 결론을 내려 의학이라는 선택의 짐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나의 결론은 그리 깊지 못하다. 실제로 기자 인턴이나 학보사를 하더라도 생각이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철학이 뒷받침된 생각은 기자를 선택하지 않더라도, 나를 벅참의 길로 인도해주리라.
칼라니티의 근본적 피로
작곡가, 야구선수, 소설가 … 그밖에 어떤 분야에서든 연구를 거듭하면 할수록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만 시간은 대략 하루 세 시간, 일주일에 스무 시간씩 10년간 연습한 것과 같다. … 1만 시간의 법칙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1만 시간이 엄청난 시간이라는 점이다. (아웃라이어, 말콤 글래드웰, 56-59)
칼라니티는 책 곳곳에서 외과의사로서의 섹시함을 풍긴다. 큰 톱을 가져와서 훌륭하게 엉덩이뼈 수술을 집도하기도 하고, 뇌에 종양이 생긴 환자를 세밀하게 치료하기도 한다. 의과대학에 입학한 뒤 그는 레지던트까지 총 10년여의 시간을 외과 연구와 집도에 쏟는다. 추측건대 칼라니티가 쏟은 10년여의 시간은 1만 시간을 훌쩍 넘겼을 것이다. 레지던트 생활부터 밤을 새웠고, 피로한 삶을 지속했으니 1만 시간은 무슨, 3만 시간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칼라니티의 피로는 스스로를 물질 구조에 던져 착취하는 ‘탈진 피로’가 아닌 ‘근본적 피로’였다. 최근 평창에서 돌아온 친구는 초과근무를 115시간 했다고 말했다. 나는 건강에 우려를 표했지만, 그 일을 한 동기에는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일복이 많은 걸 떠나, 그 친구가 일을 잘하려는 근본적 피로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칼라니티 역시 죽음과 삶 사이의 치열한 현장을 몸소 느끼려 했기 때문에 몸은 힘들었을지언정, 정신은 명료했다. 그는 치열한 현장에서 위대함을 추구하기 위해 기술을 연마했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가치를 살리기 위한 기술이었다.
외과의사로서 칼라니티의 위대함은 기술 연마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실 기술이 뛰어난 의사는 많다. 하지만, 기술만 뛰어난 의사도 많다. 병원의 1차적 목적은 치료이지만, 외과에선 치료로 그쳐선 안 된다. 외과의사들은 환자의 죽음을 다루는 기술도 뛰어나야 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가완디는 이런 고민을 훌륭하게 풀어낸다.
의학은 죽음과 질병에 맞서 싸우기 위해 존재한다는 단순한 시각도 있다. 그러나 죽음이 적이라고 한다면, 그 적은 우리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죽음을 맞을 때까지 싸우는 것일 뿐이라면, 결국 최악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걸 이해하는 누구가가 필요하다. 우리 의사들은 “멈추고 싶으면 알려 줘.”라고 말하는 장군이 되어가고 있다. 더불어 의사들은 전면적인 치료 과정을 두고 언제라도 하차할 수 있는 기차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너무 큰 요구사항이다. 따라서 의료인들의 책임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다. 차마 꺼내기 어려운 대화를 기꺼이 나눠 줄 의사와 간호사가 필요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286-287)
칼라니티도 외과의가 갖춰야 할 태도를 오랫동안 고민한다. 처음에 칼라니티는 정보 전달형 의사였다. 죽음을 맞이하는 데 필요한 수술 과정 등을 일일이 나열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칼라니티는 죽음에 있어 서비스업 같은 의사의 태도는 환자들에게 큰 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정보만 전달하고 환자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는 서비스업 방식은 ‘인간은 모두 합리적이다.’라는 합리성 신봉에 기초한다. 따라서 큰 질병이 아닌 경우에 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결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도 합리성을 띤 대화를 지속할 수 있을까? 칼라니티의 철학 가치는 외과의로서 정보 전달형 의사의 문제를 빠르게 깨닫는데 도움을 주고, 환자 중심의 외과의사로 관점을 변화시킨다. 칼라니티는 ‘환자 중심의 케어’라는 단순한 슬로건에 그치는 게 아닌, 인간다운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따뜻함으로 무장한 의사였다.
끝까지 훌륭함 성취하기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을 좋게 얘기하는 경향이 있어. 하지만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아빠를 칭찬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란다. 아빠는 정말 그렇게 훌륭하고 용감한 사람이었어. (263)
외과의사로서 승승장구하던 칼라니티는 갑작스럽게 환자가 된다. 단순한 감기가 아닌 죽음으로 가는 질병이 그를 무장시킨다. 아내 루시의 에필로그에는 칼라니티가 ‘시간이 날 때마다, 심지어 환자가 된 뒤에도’ 글을 썼다고 나와 있다. 루시는 젊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섹시한 칼라니티의 모습도 그립지만 병에 걸려 무너지기 직전에도 정체성을 놓지 않고 글을 남기려 한 칼라니티가 더 그립다고 얘기한다. 죽음이 임박하면 삶의 관점이 좁아진다. 미래를 계획할 수 없게 되므로,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점에서 칼라니티가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놀라운 일이다. 자신이 10년 넘게 몸담았던 외과의사로서의 정체성이 무너졌음에도 끝까지 훌륭함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물론 칼라니티는 병을 한 번 회복했다. 처음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칼라니티는 ‘무너진 것 같았다.’는 표현을 한다. 처음에는 그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에마의 도움과 의지로 병을 회복하고, 외과의사로서의 삶을 살다가 다시 병에 걸렸을 때 그는 꽤 담담했다. 한 번 병을 이겨낸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담담했던 이유는 다음엔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우리는 죽음에 너무 무감각한듯하다. ‘모두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명제에 동의하면서도, ‘나랑은 좀 멀걸?’이란 생각을 동시에 한다. 그렇기에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죽음에 우리는 어쩔 줄을 모른다. 칼라니티의 진정한 위대함은 죽음 앞에서도 가치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모습이 아닐까.
추위는 녹는다
작년 12월, 윤종신은 정인과 함께 <추위>로 <좋니>가 화려하게 장식한 17년의 월간 윤종신을 마무리한다. 추위의 가사와 칼라니티의 삶을 비교해보면, 위대함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실히 드러나지 않을까.
아무리 옷깃을 올려도
파고 들어오는 냉기에
입김을 다시 얼굴에 부빈다
아무도 주위에 없어서
나를 바라보지 않아서
웅크린 내 몸이 그렇든 말든
뿌예진 안경이라도
내 몸을 녹일 수만 있다면
그놈의 집도 들어갈 수 있어
얼어붙은 혀가 뭐라고 하던
몸이 녹으면 후회할까
얼어 죽을 용기도 없이
그 길을 걸을 생각을 했냐고
살갗 좀 아려 온다고
발이 좀 무감각해진 것 같다고
덜컥 겁이 나서 안주 한 걸까
그냥 좋은 게 좋은 게 아닐까
이 계절은 꼭 날 찾아와
뼛속 나약함을 확인시켜줘
굳이 고된 나를 택했던
내 사람의 눈 바라보게 해
까마득한 이 계절의 끝
너무 아득해 아득해
밤이 찾아오면 누군가
스산하게 귀에 속삭여
이 계절은 여기서 머물라고
여기서 그냥 살라고
더 가봤자 거기서 거기라고
여기까지 온 게 대단하다고
이젠 짐을 풀고 수다 떨자고
이 계절은 꼭 날 찾아와
한낱 이기심인 듯 느끼게 해줘
굳이 고된 나를 택했던
내 사람의 눈 바라보게 해
까마득한 이 계절의 끝
너무 아득해 아득해
오르막을 넘어 찾아온
이 바람 살을 도려낼 듯한데
굳이 걷는 나를 택했던
내 사람은 계속 가라 하네
까마득한 이 계절의 끝
결국 올 거야 올 거야
녹듯이 결국
그래, 우리의 추위는 결국 녹을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닌, 위대함을 추구할 때 말이다.
1) 칼라니티는 너무 헌신했기에 자신의 몸을 잃어버렸다. 영혼이 없다.'는 관점을 받아 들인다면, 가치를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는 몸이다. 몸이 없이는 어떤 가치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건강의 중요성을 잃어봐야 알기 전에, 빨리 건강검진을 해보자.
이 글은 제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s://blog.naver.com/davichi023/221245047232
https://blog.naver.com/davichi023/221245050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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