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중심주의가 꽃피우는 후기자본주의 시대, 아동중심 교육관이 경제중심 사고와 맞물려 마치 학습자가 모든 교육과정의 주체가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이홍우도 지적하듯이 과연 학습자가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아니 자신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을 안다면 이미 학습이 된 상황일 것이므로 이는 모순이다. 우치다는 이런 현상, 즉 교사에게 무엇인가 기대하는 마음 자체를 라캉의 오독 개념을 빌려와 검토한다. 나아가 우리가 우연하게 발견할 때, serendipity가 진정한 학습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하는 낭만적 인문학자다.
물론 학교 민주화가 중요하고 상향식 의사결정이 지향되어야 하는 민주주의 사회이지만 교육에서 (아마도 다른 분야도 그럴 것이지만) 이 접근은 단지 학습자가, 즉 소비자가 왕이라는 생각과 직결될 수 없다. 교육은 그래서 다른 인간 만사와 다르며 교사는 그러한 점에서 책임감이 막중하다. 물론, 라캉의 이론을 가져와서 말하면서 굉장히 추상적으로 또 이상적으로 전개한 논리가 많아 이 책의 논지를 그대로 적용한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오독이 허용되고 장려된다면 우리가 가진 전통적 교사관, 즉 교육과정 전달자로서의 이미지 역시 손상을 받기 때문이고 이는 이홍우와 그 Peters학파에게서도 지지를 받을 수 없을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사교육에 찌들어서, 마치 쪽집게를 해주고, 시험 성적을 올려주고, 어떤 기술과 능력을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교사의 능력이나 이념처럼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교육에 존재한다는 깨달음이다. 우리는 단지 그런 것들을 지향할 뿐이지 그것을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목표일 뿐이다 (물론 그 자체로 의의가 있지만). 아포리아의 문제인데, 교사는 알지 못하지만 알지 못하지 않는 것처럼 내용을 전달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따라서 교사는 이를 숙지하고 반드시 자신의 교수가 오류가 있거나 혹은 완전한 진리라고 여겨지게 전달해서는 안 된다. 배우지만 실제로는 쓸데없는 것이 된다.
이런 깨달음은 취업전문학교로 변질되는 고등교육의 현장에서도 큰 시사점을 준다. 원래 목적을 꼭 천대 만대 지속시켜야만 한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거짓 허상과 이데올로기를 굳이 강화시키고 또는 거기에 편승하여 교육의 마지막 본질인 '반성'마저도 져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스승'을 만날 것이라고 한 작가의 의도는 모든 것을 인위적, 도구적 합리성으로 재단하지 말라는 경고와도 같으며, 우리의 진정한 욕구가 언어의 합리성으로 완전히 드러날 수 없다는 라캉의 분석에 기반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생각이 실제 교수현장에서 마주하는 여러 문제상황에 큰 도움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대로 중등교육 수혜자들이 이런 생각을 조금 가지면 더 좋지 않을까 싶고, 한편으로는 공자의 삼우지교를 너무 거창하게 풀어낸 글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