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람들은 이 세상의 탄생을 신화와 이야기로 설명하려 했다면,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적인 사실들을 동원해서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묘사해보려는 시도가 나타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읽으면서 든 생각은 나라는 존재, 그리고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이 시간에 태어나고 만나기 위해서 참 많은 일들이 있어 왔다는 것과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요즘들어 내게 인생이란 영원성에 대한 믿음과 의심 사이의 끝없는 갈등이다. 어렸을 때는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는 신선함과 즐거움에 익숙해져서 상실에 대한 생각은 해 볼 기회가 없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내게 익숙하던 모든 것들이 없어져간다는 느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조금 후면 초등학생 때부터 유지해오던 학생이라는 신분을 떠나 사회인이 되어야 하고, 그와 동시에 부모님이라는 안락한 둥지에서 걸어 나와야 한다. 항상 옆에 있을 것만 같았던 7년 내기 친구들 중 몇은 자신의 길을 찾아 외국으로 떠났다. 가장 마음이 아픈 건 우주에 대한 책을 읽으며 잠이 들면 꿈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은하수를 보고 설레었던, 조금은 순진하고 세상이 마냥 아름답게만 보였던 과거의 나 자신과도 서서히 작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서로를 밀치며 달려가는 이 사회에서 물렁하게 남기에는 이제껏 긁혀온 상처가 너무 아프다. 내가 그러기에 남들도 계속해서 변할 것이라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 된다. 이렇게 모든 것이 변하고 없어진다고 생각하니까 새로운 것에 마음을 주기가 무서워진다.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어진다. 어른들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보수적이 되는 것은 어쩌면 상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 책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옛 중국 고전 속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이 모두 있는데, 변하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이요, 변하지 않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시간의 지도>를 보면 그 말이 정말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책 속 우주와 지구의 역사는, 그리고 옛날의 인류는 두려워하며 변화를 망설이는 나와는 사뭇 달랐다. 내가 상실을 무서워하며 사회에 맞추어 억지로 변화하는 동안, 세상은 두려움 없이 발전해나가고 꾸준히 시간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과거의 수많은 시도들처럼 내가 두려움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쉽지 않다. 이때까지 살아온 이십몇 년 남짓한,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꽤 짧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전부인 이 시간들은 앞으로 내가 살아갈 많은 세월들에 대한 두려움을 지혜롭게 포장해주지는 못하는 듯 하다. 그래서 한없이 평범한 사람인 내 결정은 가끔은 바보처럼 영원성을 믿어버리는 것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영원할 것처럼, 눈이 내리는 이 겨울의 아름다운 풍경도 영원할 것처럼, 그 속에서 즐거워하는 나도 영원할 것처럼 믿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생각들을 만날 때도 그것의 상실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고, 두 팔을 활짝 열고 반겨보는 것이다. 가끔은 그 영원성이 배신당하고, 이성이 모 든 것은 유한하다고 나를 설득시킬지라도, 언제 찾아가도 변하지 않을 작은 깃발 하나를 내 안 어딘가에 꽂아 지키고 싶다. 내가 두려울 때, 혹은 내가 그렇듯이 누군가 변해가는 세상이 두려울 때 그 깃발을 보고 잠시나마 웃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