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을 하면서 오랜만에 장편 소설을 읽게 된 터라, 부담이 가지 않는 두께의 <시계태엽 오렌지>를 읽게 되었다. 200페이지 가량의 책이라 손쉽게 읽을 수 있었고, 내친 김에 영화까지 보게 되었다. 내용은 10대의 폭력적이고 사악한 주인공 알렉스가 자신의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되어 특수한 교화 프로그램을 받는 것이며, 그 이후 풀려나온 뒤의 일까지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는 책의 마지막 부분인, 교화 프로그램으로 다시 치료 받은 후의 일이 삭제되고, 치료받는 모습으로 끝마친다. 책과 영화를 동시에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죄를 지은 인간은 어떻게 처리해야하는가? 사회가 행하는 처벌은 폭력인가 아닌가? 등이 질문이 남았다.
난 ‘사악한’이란 단어가 상상적인 단어라고 생각하는데, 사악하기만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순수하게 사악한 행동이나 의도를 겪어본 적이 없어서기도 하다. 물론 다른 대부분의 감정이 그렇지만, 사악하다는 단어는 특히 그렇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주인공 알렉스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악함이 나의 관심을 끌은 것이다.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다른 등장인물들도 상당히 특색있었는데, 사악한 등장인물들은 마치 작가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불신으로 만들어낸 화신들 같았다. 이들은 극단적인 범죄자의 모습으로 드러나고,인물들의 부정적인 면모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대한 사회가 가진 통제의 욕망을 자극한다.
현대에도 강력범죄에도 구속이라는 형식으로 자유의지의 박탈을 시도한다. 그러나 작품 내에서만큼의 완성도를 실현시키진 않는다. 작내에서 사회가 의도하는 자유의지의 박탈은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일방적인 폭력의 예시로 충분하다. 책 후반부에 들어서서 정부가 전체주의적인 정책을 펼치고 또 반대자들을 이유 없이 처벌한다는 정황을 암시하기 때문에, 정부가 과연 인간의 의지를 획일적으로 조정할 수 있을 만큼 올바른 방향을 가질 수 있냐고 물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교화방법은 사회에 내재된 교육의 메커니즘이 직설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폭력적인 일련의 영화를 보는 인물의 모습을 통해서, 개인을 교육하고, 특정 성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문화가 가진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고, 반대로 그것이 작품에서처럼 누군가에게 통제될 경우 펼쳐질 비극도 떠올렸다. 책과는 다르게 사회적 교육은 일상생활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물론 알렉스는 루드비코 실험에 따른 역겨움을 치료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가 범죄에 흥미를 잃고 개과천선한 피트의 모습에 충격을 받으며 철이 드는 모습은 간접적으로 들어선 사회적 메커니즘에 적응했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읽고 또 영화를 보면서 내려야 할 답은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란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진 자연적인 폭력성과 인간이 구성한 사회가 가하는 개인에 대한 폭력은 양쪽에서 인간을 압박한다. 동시에 인간은 말미에 알렉스가 철이 들어버리듯이 자연적으로 내재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도 하고, 교도소나 루드비코 실험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해결하기도 한다. 자연적인 자유의지와 기계적인 사회의 조합을 표현한 시계태엽 오렌지는 상당히 인상 깊은 비유라고 생각되는데, 오렌지가 스스로 자라듯 인간은 자라나지만, 그 안엔 태엽과도 같은 사회적인 메커니즘이 들어선 상태가 작가가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