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
김현우 옮김 / 눈빛 발행
삶은 아주 사소한 우연에서 시작하여 의외의 그림으로 이어진다. 이 책과의 두번째 만남이 그랬다.
존 버거의 『행운아A Fortunate Man ― 어느 시골의사 이야기』를 구입하고서도 한참 만에 다시 손에 쥔 것은 마침 내가 병원 신세를 지던 무렵이었다.
외래와 응급실, 또 일반병실을 오가면서 흰색 가운을 입은 부류의 직업적 특수성인지 덜된 인간의 오만방자함인지를 도통 가리기 힘든 와중이었다.
사진작가 장 모르가 작업한 다양한 앵글의 흑백사진을 포함하고도 200쪽을 넘기지 못하는 이 얄팍한 책은 그 부피의 가벼움으로 병실 머리맡에 선뜻 놓일 수 있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진보적인 지성 가운데 한 명이자 영국 출신으로 현재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가인 존 버거(John Berger, 1926~ )가 영국의 한 산골짜기 시골 마을의 의사인 ‘사샬’의 족적을 따라가며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이 책은 전혀 가볍지도 않을 뿐더러 쉽게 흘려 버릴 수 없는 그런 무게와 종류의 사유로 가득하다.
작가는 애써 “시적 파격으로 논리적인 사고를 대신한다”고 책의 말미에 적고 있지만, 간명하면서도 철학적인 그의 글은 때로 시적으로 유려하게 빛나면서도 그 어떤 논리적인 연설문보다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다. 머리를 차갑게 식히면서 동시에 가슴을 뜨겁게 데우는 글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제목만큼이나 읽는 이를 ‘행운아’로 여기도록 만드는 이 책의 미덕은 그렇게 곳곳에 밑줄을 그어가며 곱씹어 읽을 대목으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심리적인 면에서 알아줌은 지지를 의미한다.
몸이 아프면 사람들은 곧 그 병이 특별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다. […] 특별하다는 느낌을 악화시킨다는 점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불행감도 질병과 비슷하다. 좌절감은 자신만의 차별성을 확대시키며 스스로 커져간다. […] 문제는 자기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무엇을 외부세계에서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확인의 부재는 곧 무기력함으로 이어지는데, 이 무기력함이 바로 외로움의 핵심이다. […] 누군가 자신을 알아준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던 불행감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pp. 80-83)
사샬은 항상 정확하고 성실하게 환자의 병을 치유하려 애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손이 청진기와 메스에만 의존하지 않듯, 그의 눈이 살피는 환부는 환자의 몸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상의 가려진 풍경, 마음 전체에 걸쳐 그의 따뜻하고 섬세한 눈과 귀가, 그리고 체온이 훑고 지나간다.
가난하고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으며 그래서 인생에서의 성취보다 박탈감을 더 많이 맛봐야 하는 없는 자들을 돌보는 사샬의 곡진한 시선은 일생에 걸쳐 계속된다. 동정과 무조건적인 호혜의식이 아닌 형제로서의 친밀감, 진심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 “설명해주고, 편하게 해주고, 이해해주고, 비통함에 빠진 사람들과 똑같은 밀도로 시간을 느껴주는 고통”은 어느새 그의 인생 목표가 된다.
사샬은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예의를 갖춰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인간됨의 조건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철학적 질문에 ‘실천하는 행동’으로 답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하면 사샬은 “환자들을 알아주었다.”
존 버거는 1930년경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에서 썼다는 에세이(Antonio Gramsci, The Modern Prince and Other Writings)의 한 구절을 빌려와 이렇게 글을 맺는다.
지금까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항상 소위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 일반’의 문제로 제기되었다.
본질적으로 ‘단일한 개념’이나 ‘인간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하나의 추상에 근거해 인간에 관한 과학―즉 철학―을 세워보려는 시도들뿐이었다. 하지만 ‘인간성’이라는 것은, 실재로서든 개념으로서든, 과연 출발점인가?―그것은 도착점이 아닐까?
나 자신 인간의 삶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질문은 말로 대답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직 행동만이, 더 인간적인 사회를 창조하는 것만이 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p.178)
이근혜 / 문학과지성사 국내문학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