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고른 계기란 뭘까. 책을 고른 계기를 생각해내려면 언제나 답답한 생각이 드는데, 정말로 별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고르는 기준을 생각해보자면 우습지만 대게 문학상과 같은 권위를 따르기도 한다. 요새는 얇고 금방 읽힐 것 같은 책 위주로 고른다. 그러나 그건 책을 사는 기준이고, 읽는 기준은 첫 장에서 무엇을 보여주는가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는가. 향후의 독서를 결정하는 것은 첫 장이 50프로다. 이 책도 난감하지만 있어 보이는 첫 장을 읽으면서 시작되었다. 책의 첫 장에서 화자는 어떤 추상적인 분노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대적인 분노에 대해 설명한다. 이탈리아에 있었던 파시스트의 탄압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주인공의 침묵과 분노를 첫 장으로 한다.
책의 내용은 이탈리아 사람인 화자의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어머니를 버리면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사연이 구구절절 적힌 편지를 보내고, 양해를 구한다. 주인공은 이미 부모와 떨어져 산지 15년이 지났고, 편지로만 연락을 하던 터였으나, 부모가 갈라섰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급작스레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찾아 고향 시칠리아로 떠난다. 가는 길에 만난 롬바르디아 거인과 시칠리아 인들, 그리고 시칠리아에서 만난 어머니와 어머니가 봐주는 환자들 등의 등장인물과의 대화가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다.
대화의 상대방이자 주인공인 인물들은 시칠리아 인들이다. 시칠리아 인들은 모욕당한 사람들이다. 이들 세상으로부터 '모욕당한 사람들'이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자하는 풍경이다. 모욕당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전에 모욕이란 무엇인가? 모욕 받은 사람들은 상처받은 사람들, 형체를 알 수 없는 추상적인 분노에 휩싸인 채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이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동시에 아들의 죽음으로 명예를 얻는다. 병이 깊은 여인들은 자신의 병든 나체를 보여주고, 칼갈이를 포함한 일행들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공유한다. 주인공은 시칠리아를 떠돌면서 사람들을 모욕하고 동시에 그들로부터 모욕 받는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매력 있는 여자로 보이지 않는 탓에 생긴 모욕을 다시 남편을 무시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치켜세우는 과정을 통해서 치료한다. 모욕은 물결처럼 퍼져나가고 파도가 되어 돌아온다. 말하자면 모욕의 순환고리인 셈이다. 그들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존재이다. 배경이 시칠리아가 아니고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 모욕당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한다.
형식상의 특이점으로 이 소설이 리얼리즘 소설로도 분류되고 환상문학으로도 분류된다는 점이다. 사실적인 묘사와 사건의 진행 속에 존재하는 상징들과 알레고리는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를 전달해준다. 또 다른 점으로 연극적인 묘사와 서술이 특징적이다. 대사는 연극에서처럼 이루어지는데 나에게 이 대화가 주는 시각적 효과는 상당히 단순하면서 강렬했다. 연극처럼 보이는 순간 사건들이 작위적이면서도 그럴듯한 일들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주인공이 전쟁에서 죽은 자신의 동생을 만나는 장면에서 극을 이루게 되고 기묘한 상황 속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욕이란 무엇인지 전달한다. 그것은 파시즘의 역사 속에서 소외되고 무시받은 이탈리아인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시칠리아의 모욕받은 존재들을 만나는 주인공의 여정은 자신의 동생을 만남과 동시에 외면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과도 조우한다.
환상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분위기와 연극적인 인물과 사건의 전개는 시칠리아에 음산하게 깔려있는 모욕 받고 상처받은 세계를 잘 표현해냈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사건의 실체를 들여다보지 않고 분위기만으로 무언가를 묘사해 낼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놀라운 발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