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관
이커머스 업체에서 데이터분석 인턴으로 일하던 때가 생각나는 책이다. 귀납적 방법으로 진리를 어떻게 발견하는지의 방법론,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 - 우상의 파괴- 에는 무엇이 있는지 밝힌, 현재까지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주는 책이었다.
이제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하려는 시도가 보편화되어 있다. 직전에 쓴 ‘모두 거짓말을 한다’라는 책에서도 방대한 구글 검색데이터를 바탕으로 어떤 경향성이나 특징을 찾아내어 일반화하는 작업이었다. 유사한 맥락으로 ‘빅데이터’라는 단어도,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이전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던 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방법 중 하나인 셈이다.
이처럼 ‘진실을 알기 위해 주어진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탐구방식’을 처음으로 제시한 책이 바로 프란시스 베이컨의 ‘신기관’이라는 책이다. 1600년대에 쓰인 책이지만, 베이컨이 제시한 ‘우상의 파괴’ 개념은 데이터를 통해 진실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뇌리에 새겨야 할 정도로 옳은 말들로 가득차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 이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에서 말한 고전적 세계관과 연역적 탐구방식이 과학의 초석이었다. 연역적 탐구방식이란 ‘기존에 증명된 일반 명제로부터 특정 사실을 판단하는 형태의 논리학’을 말한다. 이러한 형태의 방식은 ‘새로운 지식’을 ‘기존에 알려진 지식’을 바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신기관>이라는 새로운 저서를 통해 ‘귀납적 탐구방식’을 제시했다. 귀납적 탐구방식은 ‘경험할 수 있는 구체적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명제를 도출하는 방식’을 말한다. 베이컨은 ‘자연 속에는 우리가 이제껏 알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짐작도 할 수 없는 보물들이 인간에게 쓰일 날을 기다리며 묻혀 있다’는 주장과 함께, 자연에게서 주어지는 현상을 실용할 것을 주장한다. 실용의 방법으로 ‘관찰, 실험을 바탕으로 한 귀납적 탐구’를 제시했다.
베이컨의 혜안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바로 ‘어떻게 하면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신기관> 1편은 ‘파괴’편으로, 제대로 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신에 뿌리박힌 편견, 즉 우상(idol)을 먼저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여기서 그 유명한 4개의 우상 -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 이 등장한다.
- 종족의 우상: 인간이라는 종족의 특성 때문에 생기는 편견을 말한다. 모든 것을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믿고 싶은 대로 보는 경향을 의미함
- 동굴의 우상: 교육 수준이나 성장배경, 습관이나 우연으로 생겨난 개인적인 편견을 의미한다.
- 시장의 우상: 구성원 간 의사소통 단계에서 언어의 오류나 잘못된 개념 때문에 생기는 혼란을 말한다.
- 극장의 우상: 학파나 학설의 그릇된 논문이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 생기는 우상을 말한다. 전문가나 종교인의 말을 그대로 믿는 현상이다.
즉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이해하려면,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야 한다’는 의미로 1권의 주제는 ‘파괴’이다.
올바른 지식을 쌓기 위해 이전의 편견과 통념을 파괴했다면, 그 위에 새로운 지식을 세워야 한다. 베이컨은 이를 ‘건설’로 명명했다. 새로운 지식을 건설하기 위한 도구로 베이컨은 ‘관찰과 실험을 토대로 한 참된 귀납법’을 주장했고, 책에서 ‘열 탐구방법’을 예시로 들었다. 베이컨은 열 탐구를 위해
1. 열을 가진 모든 것들을 조사해 하나의 표를 만들고, 이를 ‘존재의 표’로 명명한다.
2. 열을 가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들을 조사해 표를 만들고, 이를 ‘부재의 표’라고 명명한다.
3. 열을 각각 다른 정도로 가지고 있는 물질들을 비교하는 ‘비교의 표’를 만든다.
베이컨은 이 세 가지 표를 근거로 열을 가진 것들의 ‘공통된 본성’을 찾고, 예외 또는 반대의 성질을 갖는 것들을 전부 제했다. 그 결과로 베이컨은 열을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의 운동’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을 바탕으로 한 설명으로는 ‘열=뜨거운 물체의 속성’에 그쳤던 것을 감안한다면, 베이컨의 설명력 있는 주장은 큰 호응을 받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연역논리학을 바탕으로 한 지식의 기반을 재정립하기 위해 ‘우상의 파괴’를 주장했지만, 귀납법과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정보를 얻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지금도 ‘우상의 파괴’는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표본이나 데이터가 있다고 해도 해석하는 사람이 편견에 갇혀 있을 경우 올바른 분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커머스의 데이터분석 쪽 인턴업무를 해보면서 느낀 바로는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문제를 해결하는 게 시급했다. 아무런 선입견이 없는 상태에서 소비자의 행동데이터를 바탕으로 의미를 읽어야 하는데, ‘그동안 일하면서 본 바 이런 식으로 움직일 것이다’라는 편견을 바탕으로 데이터를 보게 되면 왜곡된 결론을 맺기 쉽다. 또는 ‘해당 데이터는 어떤 기준으로 수집되었으므로 이런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또는 이렇게는 읽을 수 없다)’를 알려줘도, 자기 마음대로 해당 항목을 해석할 경우 제대로 된 분석이 불가능하다. 데이터 설계를 담당한 아키텍처와 비즈니스를 담당하는 기획자 간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경우 생기는 문제도 상당히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