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세심한 여학생 이야기
『여학생』은 다자이 오사무가 그에게 아리아케 시즈(有明淑)라는 이름의 여성 독자가 보내온 일기를 바탕으로 쓴 글이다.1) 해당 일기의 원본과 비교해 본 결과 각색이나 편집이 거의 없어 그대로 실린 것에 가깝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글에 비해서 훨씬 밟고 감성적인 묘사가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편이다. 특히 저녁놀이 지는 하늘이나 풀과 꽃에 대한 세심한 표현을 보면 순수한 소녀의 감성과 심리 묘사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오늘날에는 모작 혹은 도작으로 논란이나 비판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지만, 아리아케 시즈 본인은 자신의 글이 실린 『문학계(文學界)』 1939년 4월호와 『여학생』의 단행본을 받고 감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글은 다자이 오사무의 고향인 아오모리현 근대문학관에서 미공개 자료로서 ‘아리아케 시즈의 일기(有明淑の日記)’라는 이름으로 보관되고 있다.2)
이해 받을 수 있던 행복한 작가
다자이는 이렇게 특히나 여성 화자가 말하는 글의 경우에 다른 누군가에게 받은 글로부터 영감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양> 역시 그의 애인 오오타 시즈코(太田静子)가 보내준 일기를 바탕으로 썼다는 말이 있다.3) 또 <갈매기>를 보면 다자이는 아는 사람이 실어달라며 자신의 글을 보내주는데, 다자이는 그 글이 좋지 않음에 안타깝고 실망스러워 하며 실례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약간 손질한 후 그의 이름으로 잡지사에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4) 그런 면에서 <여학생>은 거의 손댄 곳이 없을 정도로 다자이의 마음에 매우 잘 들어맞는 글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행복은 하룻밤 늦게 찾아온다.’5)고 말하는 다자이는 일평생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할 만하나, 이렇게나 그를 잘 이해해주는 독자가 존재하였고 또 그런 독자로부터 그의 감성에 꼭 들어맞는 편지를 받았다는 점에서는 더 없이 행복한 작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몸이 다 자라도 어른이 아니다.
『여학생』의 ‘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른이 되어 가는 스스로에 대한 쓸쓸한 마음을 드러낸다. ‘육체가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혼자 성장해 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곤혹스러움이다. 무럭무럭 자라나면서 어른으로 되어 가는 나를 말리지 못하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 되어 가는 대로 맡긴 채 어른으로 변모해 가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6)’ 아직 미처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과 달리 몸은 계속해서 자라난다.
최근에는 ‘키덜트(kidult)’라고 하며 어린이의 감성과 취향을 가진 성인을 일컫는 말이 종종 사용된다. 현대인들이 순수했던 동심과 천진난만함을 그리워하는 향수에서 비롯된 단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학생』의 ‘나’는 이런 키덜트의 심리를 깔끔하게 보여주는 면이 있다. 이러한 심리묘사가 바로 다자이 오사무가 오늘날까지 오랜 사랑을 받을 수 있던 요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어른인 사람은 없다. 나이를 먹는다고 자연스레 어른이 되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공인된 시기가 지나면 한 사람은 성인으로서, 어른으로서 제 몫을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수치>에서 ‘도대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인지요.7)’라고 다자이 오사무가 담담한 물음을 던졌듯이, 사람은 언젠가 어떻게든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1) 女生徒, <ウィキペディア>, https://ja.wikipedia.org/wiki/%E5%A5%B3%E7%94%9F%E5%BE%92
2) 전상헌, “[울산에도 문학관을]지역 출신 무명작가 발굴·재조명 호평”, 2006.12.14., http://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0992#08fn
3) 다자이 오사무, 신현선, 『사양(斜陽)』, 파주: 창비, 2015, 357쪽.
4) 다자이 오사무, 김욱, 『산화』, 서울: 책이있는마을, 2004, 20쪽.
5) 앞의 책, 192쪽.
6) 앞의 책, 181-2쪽.
7) 앞의 책, 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