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학문, 역사
-‘역사를 위한 변명’을 읽고...-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저에게 설명 좀 해주세요.“
‘역사를 위한 변명’은 저자 마르크 블로크의 아들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는 별 큰 뜻 없이 물어보았을 수도 있지만, 블로크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책을 써내려갔습니다.
‘역사가 기분 좋은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애쓸 만한 가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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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의 어원은 ‘조사’, ‘탐구’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히스토리아(historia)’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어원을 통해 역사의 대략적인 의미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정확한 의미를 단순히 ‘조사’, ‘탐구’라는 말로 형용할 수는 없습니다. 마르크 블로크는 그러나 굳이 역사의 의미에 대한 세심한 정의를 내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는 ‘지나치게 세심한 정의를 내릴 경우 모든 지적 충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말하자면 아직 충분히 규정되지 않은 영역을 향해 확장될 가능성을 지닌 지적 충동을 꺾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도출해내기 위해 큰 틀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역사는 ‘과거’에 대한 학문이 아닌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 설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역사의 효용을 역사가 본래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사실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허나 ‘지나치게 세심한 정의’의 기준이 모호하며, 역사를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고 설명하는 것 또한 충분히 규정되지 않은 영역을 향해 확장될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하는 의문을 들게 하였으며, ‘인간’에 대한 정의 또한 매우 모호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역사 연구는 곧 계속 흘러가는 연대 가운데서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시간의 추이에 따라 이 두 부분 사이에 설정된 관련성이 시간 자체의 경과에서 생기는 차이보다도 어떤 때는 많아지고 어떤 때는 적어지기도 한다. 가령 우리는 가장 최근의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오래된 사물에 관한 인식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우리와 가까운 시대에 일어난 사실은 진정한 객관적 연구가 어렵다’며 ‘현재’에 대한 연구를 꺼리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의 자제력을 과소평가하였다’고 말하며 비판하였고, ‘현재’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과거를 재구성하는 데 쓰이는 요소를 최종적으로 분석하고, 필요한 경우 새로운 조명을 드리우기 위해 언제나 일상의 경험의 도움을 받고 있다. 우리가 고대의 정신 상태나 소멸한 사회형태의 특징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명칭 자체도, 만약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사실 평소에 역사를 공부할 때는 현재는 ‘역사학’에서 연구할 분야라기보다는 ‘저널리즘’이나 ‘사회학’에서 주로 연구하는 분야라 생각하고, ‘과거’에만 초점을 맞추어 공부를 했기 때문에 현재에 대한 이해를 중시하는 마르크 블로크의 주장은 굉장히 참신하게 느껴졌습니다.
마르크 블로크는 더 나아가 학문의 특성 상 주로 과거의 일에 대한 연구를 하는 ‘역사가가 자기가 연구하는 사실을 실제로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로 역사학이 단순히 ‘간접적’인 지식을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박하였습니다. 그는, ‘인류의 모든 지식은, 시간의 어떠한 지점에 적용된다 할지라도, 그 본질의 대부분을 언제나 다른 사람의 증언 속에서 얻게 된다. 이 점에서 볼 때 현재를 탐구하는 연구가들이 과거를 탐구하는 역사가들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과거에 대한 관찰이나 연구가 간접적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사료 보관의 중요성과 함께, 조작된 사료들에 의한 기만을 피하기 위한 ‘비판적인 태도’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우선 그는 역사 연구에 사용되는 증거를 ‘증거를 남긴 사람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두 번째 유형의 증거를 더 신뢰하게 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첫 번째 유형의 증거 또한 일관성을 결여했을지는 몰라도 연대기적인 틀을 제공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장점이 있다고 서술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인간이 말하고, 쓰고, 만들고, 손을 댄 모든 것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 또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마련’이라며 역사적 증거가 무한에 가까울 만큼 다양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무한한 다양성 가운데 역사와 무관한 사람들이 그러한 가능성의 범위를 사소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며, 그것은 그들이 역사에 관해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 즉 인간이 의도적으로 남긴 증거만 있던 시대의 생각에 여전히 집착하기 때문이라며 그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증거를 맹목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 중 증거를 무효로 만들어버릴지 모르는 독소 가운데 가장 해로운 것은 ‘기만’이라며, 기만을 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동기까지 찾아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또한, 그가 이를 논하며 한 말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거짓말과 헛소문의 피해를 입고 있는 우리 시대에 비판적 방법이 설사 교육 프로그램의 구석에라도 실리지 못한다면 그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 방법은 이제 더 이상 연구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몇몇 작업의 단지 보잘 것 없는 보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비판적 방법은 자신 앞에 광대한 지평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역사는 이렇게 자신의 기술을 공들여 완성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진실을 향한, 따라서 정의를 향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한 명예 가운데 하나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비판적 사고’가 더욱 강조되고 있는 이 시기에 마르크 블로크의 ‘비판적 정보 수용’에 대한 고찰은 자료를 참고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비판적인 시각에서 사실성 여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사실 나름 다양한 관점에서 한 주제를 살펴보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단지 내용을 읽고 아무런 의식 없이 그대로 참고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역사의 공정성이라는 문제와 역사의 재현 또는 분석이라는 문제’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크게 보면 역사학에서의 ‘분석’을 담아낸 내용으로, 역사 용어나 역사 구분 등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이해’에 관한 논의였습니다.
‘몇 세대 이상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의식을 탐구하려면 우리는 자신의 자아를 버려야만 한다. 타인에게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려면 자기 자신으로 남아있기만 하면 충분하다. 분명히 그러한 노력이 지나치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루터의 영혼을 탐구하는 것보다는 루터를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글을 쓰는 편이, 서구 문명의 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의 심오한 이유를 해명하기보다는 앙리 4세에 대한 그레고리우스 7세의 말을 또는 그레고리우스 7세에 대한 앙리 4세의 말을 믿는 편이 훨씬 더 쉬운 일일 것이다. (중략) 요컨대 하나의 말, 즉 ‘이해하다’라는 말은 역사 연구를 지배하고 있으며 영감을 주고 있다. 훌륭한 역사가란 열정과 무관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적어도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을 갖고 있다. 솔직히 ‘이해하다’라는 말은 우리를 곤경에 빠지게 하지만 반면 희망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 말 속에는 무엇보다도 ‘친밀함’이 깃들어 있다. 소송의 경우에서조차 우리는 너무 많이 판단을 내린다. “총살형에 처하라”고 외치기는 지극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와는 다른 사람, 즉 외국인이나 정치적 적수 등은 거의 필연적으로 악한으로 간주된다. 피할 수 없는 투쟁을 지휘하기 위해서조차 인간의 이해력이 약간은 필요하다. 하물며 적절한 시기에 그러한 투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더욱 필요하다. 역사가 스스로 대천사장이라고 착각하는 태도를 단념한다면 역사는 우리의 결함을 고쳐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다양한 인간성의 거대한 경험이며 인간간의 오랜 만남이다. 인생은 학문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만남이 우호적일수록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온전히 스스로의 자아를 포기하고 다른 자아를 탐구해나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가령 평등주의자에게 ‘히틀러’를 온전히 이해하라는 과제를 내준다면 그를 온전히 수행하기에는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합니다. ‘우리가 고대의 정신 상태나 소멸한 사회형태의 특징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명칭 자체도, 만약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라며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현재의 이해를 강조함과 동시에, 과거의 개체를 이해하기 위해 현재의 ‘자아’를 버려야 한다는 그의 말은 아직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해’에 관한 그의 통찰력은 ‘이해’를 ‘동의’와 구분하지 못했던 제게 ‘이해’가 그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납득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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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역사를 위한 변명’은 ‘역사에서의 설명’을 기술하다 말고 끝납니다. 이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이 책을 집필하던 저자 마르크 블로크가 1943년 3월 독일 괴뢰 정부인 비시 정부에 대항하여 레지스탕스로 참여하여 의용 유격대 대원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종전 이후에 이를 계속 이어나가 쓸 수 없었던 것은, 독일의 항복이 얼마 남지 않았던 1944년 3월에 체포되어 그 해 6월에 총살당하여 ‘역사를 위한 변명’의 저술을 끝마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저서를 통해 그의 생각을 온전히 습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제대로 저술되어 있는 앞 부분에 대한 습득도 매우 미흡하지만..)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강렬하게 느낄 수 있던 것은 그의 역사와 아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었습니다. 일상에서 ‘이야기’라는 형태로 쉽게 접할 수 있고, 사실 확인이 불가한 ‘과거’를 주로 다루며 단지 ‘사실’을 나열하는데 그치는 것처럼만 보여 다른 학문에 비해 학문으로서의 효용성을 자주 의심받는 경우가 많은 역사의 학문으로서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역사’에 대해 확고한 신념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변호는 그가 떠나간 지 약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이 모든 것이 언젠가 아들이 읽을 수 있길 바란 듯이 비유가 가득 담겨 있고 비교적 쉬운 단어들로 서술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정의가 아닌 것에 분노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살아있는 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역사가로서의 의무라 생각하며 충실히 이행했던 그는 그가 말한 위대한 역사가이자 가장 인간적인 역사가였다고 생각합니다.
P.S. 그가 쓰지 못한 내용이 어떨지 매우 궁금합니다. 알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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