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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다시 읽기] 03.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다.
명에서 청으로 거대 제국의 이름이 뒤바뀐 지 한 세기 반. 다양한 문화 이민족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분출하고, 커다란 명분 대신 구체적인 실리가 세상을 작동시키기 시작한 대륙 중국으로 조선 최고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이 찾아간다. 당시 중국은 거대한 문명의 용광로로서 동서의 사상이 활발히 교류하고, 기존하는 절대의 관습 대신 상대적인 지식들이 새롭게 모색되던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누군가에 의해 ‘세계 최고의 여행기’에도 비견되는 『열하일기』는 이런 배경 아래서 탄생한 것이었다. <중 략> 우리가 지금 여기서 ‘열하일기 다시 읽기’를 기획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소설처럼 재밌는 『열하일기』를 새롭게 재구성해 보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로 연재해 나갈 이는 김동석 교수다. 18세기 외교 사절로 청나라에 파견 다녀온 조선 사신들의 중국 여행기(《연행록》)들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고, 당대 동아시아 문명․문화 교류의 지형을 꾸준히 탐색해 온 연구자다. 근 5년에 걸친 중국 체재 기간 동안 관심의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고, 미처 발굴되지 않은 관련 자료들도 다수 구해 왔다. 약 40회로 예정되어 있는 이 원고들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홈페이지(http://press.skku.edu), 성균관대학교 오거서 프로젝트 홈페이지(https://book.skku.edu)에 동시에 게재되며, 연재를 마치면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편집자_ostrov 註).
[김동석 교수의 ‘열하일기 다시 읽기’_03]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다
*
2014년 올여름은 여름답지 않게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다. 혹시 이번에 내려야 할 장맛비는 다 압록강으로 몰려가 버린 것일까?
박지원이 압록강을 건넌 건 1780년 음력 6월 24일의 일이다. 올해 기준으로 양력 날짜를 보니 7월 20일이고, 평소 같으면 연일 비가 이어졌을 시점이다. 당시 박지원과 조선 사신 일행도 그랬다. 장맛비 때문에 9일 동안이나 의주성에 머물러 있은 후에야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다.
처음 『열하일기』를 접하던 때, 나는 박지원이 움직였던 날짜에 맞춰 동일한 장소를 통과하면서 그가 느꼈을 감정을 되새겨 보고 싶었다. 하지만 옛길은 사라져 버렸고, 그 길은 지금 책 속에나 존재한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젠 찾아갈 수가 없는 길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요즘 압록강 유역을 가보는 건 어렵지 않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선양[瀋陽]에 내려 바로 버스로 갈아타고 남쪽으로 몇 시간만 내달리면 된다. 압록강 유람선을 타면 바로 맞은편의 북한 땅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볼 수 있고, 단둥[丹東]의 압록강 주변에는 북한 식당이 죽 늘어서 있기 때문에 비록 타국이지만 북한 요리도 쉽게 맛볼 수 있다.
# 끊어진 압록강 철교와 신철교. 북한 신의주 땅과 중국 단둥을 연결하던 압록강 철교는 6․25전쟁의 와중에 미군 폭격으로 끊어졌고, ‘조중친선우의선’란 이름의 새 철교가 놓여 교류의 맥을 잇고 잇다.
이제 당시 조선 사행단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柵門)에 들어가기까지 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물론이거니와 동행했던 노이점(盧以漸, 1720∼1788)의 『수사록(隨槎錄)』도 참고하여 복원한 내용이다.
당일 아침, 행장(行裝)
박지원은 이날 아침에 일어나 여러 비장(裨將, 사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던 무관 벼슬)들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고, 그 인상착의를 흥미롭게 기록한다.
노이점은 환갑이 넘은 나이였지만 정사(正使, 사신들 가운데 우두머리)의 비장이었다. 정사가 의주성을 나서면 의장 행렬을 갖추어 나가기 때문에 노이점도 다른 이들과 함께 의주관(義州館)에서 철릭(당시 무관들이 입던 공식 의복)을 벗고 다른 비장처럼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머리에는 전립(戰笠)을 쓰고 장식을 했으며 공작 깃도 꽂았다. 허리에는 남방사주(藍方紗紬) 전대를 하고 환도(還刀)를 찼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계면쩍은 듯이 웃는다.
# 18세기 중엽 의주부 지도. 압록강, 삼강, 구련성, 책문 등 당시 사행단이 따라갔던 장소들이 모두 보인다. <해동지도海東地圖>(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中에서
박지원은 노이점이 차려 입은 것을 묘사하고 나서 젊어 보인다고 적는다. 노이점은 이 복장을 입고 북경까지 간 것으로 보인다. 7월 26일, 우박을 피해 가게로 들어가다가 말이 다급하게 들어가는 바람에 낮은 문에 걸려 갓에 단 장식이 부서지고 자신의 목도 다쳤다고 술회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이런 모습을 유지한 채 다닌 것 같다. 여름철 불어난 강물을 건너느라 경황은 없었겠지만, 조선 사신 일행은 의관을 갖추고 다녔나 보다.
박지원의 행장은 의외로 단출하다. 앞에서 말을 끄는 마두(馬頭, 마부) 창대(昌大)와 뒤에서 따르는 장복(張福)이를 데리고 함께 간다. 말안장에는 주머니를 두 개 달아 왼쪽에는 벼루, 오른쪽에는 거울과 붓 두 자루, 먹 한 개, 공책 네 권 그리고 한 권의 노정 기록만 가지고 떠난다. 이밖에 여행에 필요한 일상 물품은 다른 짐꾼이 운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성문을 나설 때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박지원은 의주성 성문 위에 있는 누각에 올라 비를 피하고 있다가 몰려온 사람들과 출발하려는 정사를 목격한다. 그즈음 창대와 장복이는 조선을 떠나면 사용할 수 없는 잔돈을 털어 모아 술을 사온다. 박지원은 이 술로 여행의 안녕과 동행자들 그리고 말을 위해 고수레를 한다. 지금도 해외여행을 다닐 때마다 동전을 분실하지 않고 다니기가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다. 돈이라서 버릴 수도 없고 갖고 다니자니 불편하다. 이들도 그랬던지 출발 전에 잔돈푼을 유용하게 써버린다.
때마침 정사가 도착한다. 성문 쪽이 술렁이더니 성대한 의장 행렬이 이어진다. 박지원이 누각에서 바라다보니 깃발과 곤장 같은 것들을 앞세워 정사 박명원(朴明源)과 부사(副使)가 나오고, 뒤를 이어 박지원의 삼종 동생인 박래원(朴來源)과 상방비장(上房裨將) 주명신(周命新)이 두 줄을 만들어 나오고 있었다.
가죽 끈 달린 채찍을 옆구리에 끼고, 몸을 바로 세워 안장에 걸터앉아 어깨가 높고 목이 길어져서 용맹스럽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깔고 앉은 자리의 이불과 전대가 너무 어지럽게 빽빽하고, 하인들의 짚신도 안장 뒤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박래원의 군복도 푸른 모시옷이지만 오래된 옷을 새로 빨다 보니 가장자리 실이 헝클어져 말아 올라갔으니 너무 검소한 것을 숭상했다고 할만하다.1
가만히 그 모습을 떠올려 보면, 여기서 박래원과 주명신은 다소 익살스럽다. 앞으로 자주 인용되겠지만, 묘사상의 이런 파격은 『열하일기』에 종종 등장한다. 무슨 의도였을까? 조화 속에서도 부조화를 이끌어 내거나 정적인 분위기를 일순 동적인 분위기로 반전시키는 효과를 노린 건 아니었을까?
업고 건너자니 너무 무거워
서장관(書狀官, 기록 등의 실무를 맡아보던 사신)은 배를 탈 준비를 하기 위해, 이미 새벽녘에 만윤(灣尹)과 함께 먼저 압록강으로 가 있었다. 박지원도 부사의 뒤를 따라 5리 정도를 가니 압록강에 이르렀다. 노이점은 사행단의 규모를 사람 270명과 말 194마리라고 밝히고 있다. 이날 압록강을 건너 이어간 노정은 다음과 같다.
압록강 → 언덕 → 방피포(防陂浦) → 삼강(三江) → 구련성(九連城)
삼강은 애랄하(愛剌河)라고도 한다. 원래는 압록강에서 5리를 가면 소서강(小西江)에 이르고, 다시 1리를 가서 중강(中江)에 이르고, 다시 4리를 더 가서 방피포에 이른다. 노이점과 박지원은 장마로 불어난 물 때문에 직접 방피포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5리를 가서 삼강에 이르고, 다시 5리를 더 가면 구련성이다.
방피포에서 삼강에 이르기까지는 의주[灣府]에서 미리 대기시킨 청정(蜻蜓)이 사용된다. 청정은 잠자리 모양으로 생긴 배로, 통나무의 속을 파서 만들었다. 삼강은 흘러 들어가는 물이기에 장마 때라 하더라도 압록강만큼 물살이 세지 않았다고 한다.
# 세 물줄기가 모여드는 삼강 주변
삼강을 건널 때는 봉황성(鳳凰城)의 장군인 봉성장군이 배를 준비시켜 놓았다. 원래 이곳은 청나라와 외교문서를 급히 교환할 때 서로의 편익을 위해 청나라 측에서 배를 준비시켜 두는 곳이었다. 박지원이 있는 곳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는 몸을 솟구쳐 뱃사공에게 업혀야만 했다. 그런데 대기하고 있던 중국인 뱃사공에게 박지원은 너무 무거웠나 보다. 그는 낑낑거리며 배로 들어와 긴 숨을 내쉬며, 중국어로 이기죽거린다.
“흑선풍(黑旋風)의 어머니가 이 정로로 무거웠다면, 아마도 기풍령(沂風嶺)에 올라가지 못했을 겁니다.”2
흑선풍은 『수호전(水滸傳)』에 등장하는 이규(李逵)라는 인물이다. 그는 물불 안 가리며 쌍도끼를 휘두르는 술고래 캐릭터였다. 뱃사공은 자신이 박지원을 업어 주는 상황을, 흑선풍이 어머니를 업고 산을 넘고 가는 장면에 비유하고 있다. 이때 주부(主簿, 아문의 문서와 부적을 주관하던 종육품 벼슬) 조명회(造明會)가 박지원에게 뱃사공이 한 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해 준다.
“그 사람[뱃사공]의 말 속에는 무한한 의미가 담겨 있지요. 먼저 이 말은 원래 흑선풍의 어머니가 이리도 무겁다면, 신력(神力)을 지닌 흑선풍이라 할지라도 등에 업고 고개를 넘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흑선풍의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이렇게 ‘살진 고깃덩이’는 굶주린 호랑이에게나 주는 게 좋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3
『수호전』의 내용을 찾아보면 이렇다. 산에서 흑선풍은 어머니에게 마실 물을 떠다 드리기 위해, 잠시 어머니를 내려놓고 골짜기로 내려가 물을 떠 왔다. 그런데 그 사이에 어머니가 사라져 버렸다. 어머니를 찾다가 호랑이 굴에 가보니 어머니는 이미 호랑이게 잡아먹힌 채였다. 분노가 치민 흑선풍은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 죽였다.
호랑이도 때려잡는 괴력의 흑선풍. 그러나 그도 버거워할 무게의 박지원. 그 통통한 살집은 호랑이 밥으로나 제격…… 즉, 조명희의 언급을 통해 『수호전』이란 문학 텍스트의 한 스토리는 『열하일기』로 인용돼 들어온 뒤, 상상력이 가미된 새로운 의미들로 도약한다. 박지원의 탁월한 문학성이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박지원이 타고 건넜을지도 모를, 압록강변 어느 나루터와 나룻배
또 한 가지, 이 대목에서는 『열하일기』의 여러 판본들과 관련된, 문헌학적 의미도 되짚어 볼만한 하다. 사실 박지원의 살아생전에는 일반 대중들을 위한 판본으로 간행된 『열하일기』는 거의 없었다. 일제 강점기가 되어서야 광문회(光文會, 1910년에 설치된 한국고전 간행기관)나 김택영(金澤榮, 1850~1927), 박영철(朴榮喆) 등에 의해 박지원의 문집(『연암집』) 형태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박영철 본(本)의 『열하일기』에는 상기의 조명회가 언급한 내용이 빠져 있다. 분명 박지원 스스로가 적어 남겨 두었거니와 여타의 판본에서도 살아 있는 그 ‘문학적 표현’은 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뚱뚱한 박지원을 ‘살진 고깃덩이’에 빗댄 표현이 그저 불쾌해서였을까? 사실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 박지원의 작품은 크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당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그가 부각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불쾌함에 대한 편집의 과정이 필요했던 것일까? 하지만 유념해야 할 것은 원작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 못한 개작은 작품의 원래 가치를 손상시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로지 자기 마음의 눈으로 보라
삼강을 건너고 나서 산으로 가면 노숙을 할 수 있는 구련성에 도착한다. 야영을 위해 의주에서는 미리 창군(槍軍) 30명을 보내 준비를 시켰다. 밥을 짓고 닭도 잡았다. 정사는 해가 저물자 도착했고, 부사와 서장관은 어두워지고 나서야 횃불을 들고 도착했다.
당시만 해도 이곳은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과 말에게 피해를 입힐 때였다. 호랑이가 사람이 있는 곳으로 오지 못하도록 30여 군데 불을 피우고, 곳곳에 그물을 쳐서 방비하였다. 밤에 군뢰(軍牢)가 천아성(天鵝聲, 군사를 부르기 위해 길게 부는 나팔소리) 소리를 내면, 창군과 말몰이꾼이 일제히 ‘큰 소리 지르기[吶喊]’를 한다. 노이점도 자못 군대를 따라 변경에 나온 기분이 든다고 이때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압록강을 건넌 조선 사람들은 구련성과 총수참(葱秀站)에서 노숙을 마친 뒤, 책문으로 향한다. 목책으로 울타리가 쳐지고 따로 출입구가 만들어진 이 책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청나라에 입국하게 되는 셈이다. 검열을 맡은 봉성장군이 30리나 떨어진 내봉황성(內鳳凰城)에서 오기 때문에 사신의 일행은 으레 책문 앞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위) 봉황성 초입의 현재 모습
# (아래) 당시 봉황성장의 관사가 있던 자리엔 허물어져 가는 낡은 공장 건물들만 서 있었다.
봉황성장은 조선 사람들이 책문에 다 모여야 ‘겨우’ 나타나곤 했다. 중국 특유의 관료주의라고 할 것까진 없겠지만, 이 시간 개념 없는 입국 수속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나 보다. 몇 년 전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톈진[天津]에 도착해 보니, 해관 직원은 몇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얼굴을 내밀고 수속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짐을 먼저 배에서 내리기 때문이라지만, 필요 이상의 시간이란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아니면 기다리는 시간이란 언제나 지루한 법인지도 모를 일이고. 당시도 열리지 않는 책문의 목책을 사이에 두고, 조선 역관들과 청나라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조선 사신 일행은 통관 절차를 마치고 나서, 20∼3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북경에서 다시 조선으로 되돌아가는 길에도 사행단은 책문에 도착해 볼 일을 보며 뒤따라오는 의주 상인들을 기다렸다. 이들이 모두 도착해서야 책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조선 역관들과 책문 주변의 청나라 주민들은 가깝게 지낼 수가 있었다.
노이점과 박지원이 각각 책문과 그 주변에 대해 느낀 것은 서로 달랐다. 노이점은 책문에 서 있는 목책의 형태가 돼지우리 같다고 말했지만, 박지원은 거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생애 처음으로 접하는 이국의 풍경에 감격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목책 안에 잘 정리된 집과 그 주변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시기심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하고, 부처처럼 혜안(慧眼)을 가지고 세상을 평등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한다. 그리고 장복이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이런 곳에 태어났다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그랬더니 장복이의 대답이 가관이다.
“중국은 오랑캐입니다. 소인은 중국에서 태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박지원은 실망을 하고, 옆에 월금(月琴)을 타면서 지나가는 맹인을 바라보며 그가 바로 ‘평등안(平等眼)’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무슨 의미일까?
사실 장복이의 그 답변 한 마디는 당시 북경을 가던 사행단의 분위기 전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이점이라든가 실무 책임자 주명신 같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청나라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못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잊지 못했다. 만주족이라면 무조건적인 배격의 대상이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마두들조차 청나라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덩달아 거부하였다.
박지원은 바로 이 ‘맹목(盲目)’을 꼬집은 것이다. 그리고 이를 뒤집어 정작 맹인의 눈이 공평하다고 역설(逆說)하고 있는 것이다. 맹인의 평등안은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가치관의 눈이 아니다. 오로지 자기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 그래야 실상을 볼 수 있다고 박지원은 말한다.
# 강 건너 중국 땅에서 바라다 보이는 의주 땅
조선 사행단이 책문을 들어서면 청나라 조정에서 특별히 조직한 30여 명의 관원들이 나와 맞이하고 북경까지 안내하게 된다. 때문에 조선에서는 미리 예물을 준비하여 이들에게 제공하곤 했다. 예물은 관행적인 것이었지만, 해마다 달라지는 기준 때문에 이를 두고 책문에 나온 청나라 관원들과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소동의 처리를 담당했던 자들이 또한 마두들이었다. 상삼(象三)이는 상판사(上判事)의 마두로 오랫동안 청나라에 출입하였기 때문에, 중국말이 유창했고 또한 현지 사정에도 밝았다. 이날 예물이 적다고 따지는 청나라 관원들과 구경꾼 백여 명이 모인 사이에서 상삼이는 그들에게 호통도 치고 어르며 달래기도 했다.
말장난 혹은 탁월한 언어 감각
『열하일기』는 작품 전체에 해학적인 에피소드가 넘친다. 이는 분명 유별난 기질로 박지원만이 가진 관찰력과 표현력의 힘 덕분이었다.
이날 사행단은 봉황성장의 관사 앞을 지나갔다. 보통 이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간다. 이 장면을 묘사한 노이점의 기록을 보면, 간단하게 “우리는 성장(城將)이 앉아 있는 전각(殿閣)을 지날 때 모두 말에서 내려서 간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때 어의(御醫) 변계함(卞季涵)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태연하게 말을 타고 봉황성장이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는 관사 앞을 지나고 있었다. 청나라 관원들이 화를 내면서 변계함을 끌어내려 볼기라도 치려고 하다가 이 소동은 겨우 무마되었다. 변계함은 후에 박지원을 길에서 만나 이 이야기를 했다.
“크게 욕을 봤습니다.”
“그래서 ‘臀(볼기 둔)’이란 글자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소? 잘 생각해 보시오.”
‘臀’이라는 글자는 ‘殿(큰집 전)’자와 ‘月(육달 월)’자가 합성된 글자이다. 그리고 ‘月’이라는 글자는 본디 ‘肉(고기 육)’자와 같은 글자로 쓰인다. 풀이하면, 전각 아래에게 고기가 있으니 바로 엉덩이를 까붙이고 볼기에 곤장을 맞는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글자이다. 변계함이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박지원과 함께 크게 웃는다. 일종의 언어유희이자 개그다. 또 건조한 노이점의 어투와는 얼마나 대조되는가?
박지원과 노이점은 함께 악씨(卾氏) 집에 머문다. 박지원은 악씨의 키가 7척이나 되고 모친의 머리에는 꽃단장을 했다고 묘사만 해둔 채, 집에 붙어 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반면 노이점은 악씨 집을 떠나지 않고 집에서 본 것들을 지루할 정도로 자세하게 기록한다.
글_김동석 속리산을 지척에 둔 충북 보은 출신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수사록 연구―열하일기와 비교의 관점에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랜 기간 베이징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학자로 있으면서, 아직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대국 중국의 실체를 보고 듣고 느꼈다. 주요 논문으로, 「열하일기의 인물 형상화 수법」, 「수사록과 기타 자료를 통해 읽어 보는 열하일기」, 「조선 후기 연행록의 미학적 특질」, 「일제강점기 때 소개된 연암 저술」 등이 있다. 지금도 한국과 중국 사이 하늘 길과 바닷길을 무시로 넘나든다. |
1. 이가원 옮김, 『열하일기』, 민족문화추진회 고전국역본, 6월 24일자, “鞭鞘仗脇, 聳身據鞍, 肩高項長, 非不驍勇, 而坐下衾袋, 太厖氄, 僕夫藁鞋, 遍掛鞍後, 來源軍服, 靑苧也, 舊件新浣, 鬅騰郭索, 可謂太崇儉矣.”
2. 같은 책, 6월 24일자, “出氣長息曰: ‘黑旋風媽媽這樣沉挑時, 巴不得上了沂風嶺.’”
3. 같은 책, 6월 24일자, “彼語中帶意無限, 其語本謂李逵母如此其重, 則雖李逵神力, 亦不得背負踰嶺, 且李逵母爲虎所噉, 故其意則以爲如此好肉可卑餒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