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조선 시대 중 단 한 곳의 역사만 바꿀 수 있다면 나는 1800년을 택하고 싶다. 정조가 등창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시기인 동시에, 조선을 개혁할 수 있던 마지막 열차가 떠나간 시기이기 때문이다. 정조의 죽음을 계기로, 몇 차례 환국을 거치며 입지 기반을 잃었던 남인 세력은 서인에 밀려 완전히 정계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 때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 세력이 남긴 연구나 저서에는 조선을 개혁할 수 있던 개혁정신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남인 세력은 대개 서양 학문을 수용하자는 서학파, 북학파의 길을 걷는데, 흥미롭게도 북학파 학자 중 가장 유명한 ‘박지원’은 남인이 아니라 몰락한 노론 가문이었다. 어차피 정계에서 밀려났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어찌됐건 북학파의 대표주자인 박지원이 저술한 ‘위정자가 가져야 할 경제관념’을 엿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열하일기’이다.
청 건륭제의 생일축하 사절단이 된 형을 따라 청나라에 발을 들인 연암 박지원은 책으로만 읽던 서양학문을 실제로 접하고, 발달한 청나라의 경제력을 보게 된다. 연암 박지원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랴오둥, 랴허, 베이징 등지를 4개월간 여행하면서 기록한 26편의 기행문이 바로 ‘열하일기’이다. 26편에 이르는 긴 기행문의 핵심이자 박지원의 핵심 주장은 ‘조선도 청나라처럼 발전하려면 외국의 기술문명을 받아들이고 고리타분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였다.
청의 발달과 조선의 정체를 가르는 핵심으로 박지원은 ‘운송수단과 도로망의 절대적 부족’을 꼽는다. 조선의 빈약한 육로 도로망은 조선 초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는데, 이는 결국 내륙 지방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 조선의 육로망이 물자 운송에는 최악이었다는 걸 임진왜란의 사례에서도 확인이 가능한데, 임진왜란 발발 초기 수도 한양까지 삽시간에 함락되었음에도 전쟁이 장기화된 이유가 바로 일본군이 이순신이 지키던 전라도 수역을 뚫지 못해 물자 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곡창지대를 점령한다 한들 전선으로 수송할 방도가 마땅치 못해, 7년의 전란 중 전면전은 얼마 되지 않고 대치/소모전 국면이 절대 다수였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정돈된 도로시설이나, 일반 백성도 지을 수 있던 2층 벽돌집의 정갈함 등에 감탄했다. 하지만 박지원의 관찰력과 분석력은 사소해 보이는 시스템을 포착해 기록한 점에서 돋보인다. 예컨대 박지원은 일반 가정에서 보이는 장식이 “깨진 기와를 재활용해 만든 것”이고, 당시 교통수단인 말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말똥을 수집하고 거름으로 판매하는 재활용 시스템에 주목했다. 박지원은 쓰레기로 치부될 수 있는 것들까지도 재활용하는 것이 ‘천하의 제도를 만드는 힘’이라고 언급하는데, 청나라의 길거리를 보고 이 정도의 결론까지 도달했다는 점에서 박지원의 관찰력과 분석력이 돋보였다.
이외에도 전체적으로 발전한 청나라의 사례를 보여주고 원인을 분석하며, 이에 대비되는 조선의 모습 및 위정자들의 낡은 경제관 및 정치관을 비판하고 있다. 다만 위정자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이 아니라 열하일기 내에 ‘호질’, ‘허생전’ 등 소설 형식을 통해 우회적으로 비판했다는 점도 독특하다. 반청감정과 존명배청 사상이 팽배해 있던 양반 계층에게 청나라의 발전한 실상을 보여준다는 점과 ‘호질’, ‘허생전’과 같이 위트있게 풀어낸 박지원의 필력 덕분에 많은 사대부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필사해 갔고, 북학파 사상이 양반들 사이에 조금씩 스며드는 데 기여했다. 다만 실제 정치에 반영되기에는 정치체제가 너무 폐쇄적으로 변해버려 - 세도정치 - 정계 영향력으로 번지지는 못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론 서학 중 천주교가 유교 성리학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북학파 움직임이 크게 위축된 것도 한몫한다.
그렇다고 박지원이 청나라를 맹목적으로 숭상한 것도 아니다. 한족 여성들의 전족 풍습을 비판하고, 한족 지식인들이 만주족인 청 지배세력에 아부하는 세태를 풍자하는 모습도 나타나 있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모습을 보며 ‘현실적이면서 실용적인 것의 가치’가 최우선이라고 판단했다. 백성들이 사용하기 편한 도구나 수단이 필요하고, 이것들이 갖추어져야 백성이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으며, 그 후에야 성리학이 설파하는 효 / 덕 / 충 등이 백성들에게도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즉 이용 / 후생 / 정덕을 주장했다.
박지원의 사상, 나아가 북학파의 사상이 조선의 개혁을 불러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용후생을 위해서는 성리학을 다루는 양반이 신분의 최상층에 있는 사농공상 형태에도 수정이 필요하게 된다. 박지원의 주장대로 도로를 정비하고 물자의 운송을 활성화하면, 백성의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상인과 수공업자의 중요성이 상승한다. 물자를 만들고 운반하는 사람들의 지위가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위를 공고히 하게 되면, 성리학 중심의 기존 질서를 수호하려는 기존의 지배세력과 충돌이 불가피하다. 나는 이 대립이 서양에서도 있었고, 그 대립이 크게 폭발하며 질서가 뒤집힌 사례가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보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조선 후기, 무역이나 상업으로 큰 돈을 쥐게 된 백성 계층이 양반의 족보에 이름을 넣는 형태로 신분을 샀던 정황이 발견된다. 처음에는 신흥 세력이 기존 세력의 질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신흥 세력의 규모가 커지고 힘이 강해지면 기존 세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라고 보았을 때 그 전조가 나타나고 있었던 셈이다. 안타깝게도 조선은 변화하는 시대에 편승할 수 있는 가치관을 지닌 왕이었던 정조를 병으로 잃고, 개혁을 거부하며 버티다 역사적으로 호된 대가를 치렀다.
박지원의 재치있는 필력과 생생한 기록이 담겨 있는 열하일기이지만, 역사를 공부한 입장에서는 씁쓸함이 묻어나는 책이다. 정말로 인재가 없어서, 시대를 꿰뚫을 혜안을 가진 지식인이 하나도 없어서 조선이라는 국가가 일본과의 강제합방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통렬한 상소문으로 실록에 기록되었어야 할 내용이 기행문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