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 TALK
[영화와 법] 세월호에 갇힌 우리 공주를 살려 내라
삶은 통찰해야 하는 텍스트이다
약 30회에 걸쳐 <김성돈 교수의 법과 영화>이라는 테마로, 여러 영화 텍스트들 속에 박힌 우리네 법과 세상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다. 이는 넓게 보아, 영화라는 ‘흥미로운 텍스트’의 독해를 통해, 과학, 환경, 여성, 평화, 이주 노동자, 장애우, 폭력, 인권, 사회 제도, 증오, 사랑, 삶과 죽음(생명) 등 구체적인 쟁점으로부터 추상적인 담론의 차원까지, 이 세상 삶의 여러 차원들을 꿰뚫어 보려는-통찰- 시도의 일환이다. 또한 좁게 보아, 맥락 없이 수구화되어 퇴행하는 사회를 향해 법이라는 균형의 일침을 가하려는 목적적 의도도 담고 있다.
이 꼭지들은 성균웹진과 성균관대학교 오거서에 동시에 게재된다 (편집자 註).
[김성돈 교수의 법과 영화(네번째)]
세월호에 갇힌 우리 공주를 살려 내라
―영화 〈한공주〉서사와 우리 환경의 무참함 살피기
# 영화 〈한공주〉(Han Gong-ju, 2014), 이수진 감독 작품
세월호 참사의 축소판, 영화 〈한공주〉
영화 〈한공주〉를 보았다. 분통과 안타까움을 넘어 자책감마저 들었다. 며칠 후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분노와 모멸감과 자조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세월호 민심의 전면성 때문에 세월호 사건과 무관하게 내놓는 그 어떤 말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사고와 언어가 온통 세월호 참사에 함몰된 탓인지, 어느 순간 영화 〈한공주〉도 세월호 참사를 통해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와 현실이 그 발단과 전개 그리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5천만 국민의 눈앞에서 전개된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거의 없겠지만, 영화 〈한공주〉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선 세월호 참사부터 간략히 짚어 보자.
세월호 참사
2014년 4월 16일 승객 474명을 태우고 인천에서 제주도를 향하던 6천 톤급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군 해상에서 침몰했다. 사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해양경찰 등이 현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선체가 45도 정도 기울어져 물에 잠기고 있었다. 반대편 선체는 모두 수면 위로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여객선 안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무려 325명이나 탑승해 있는 상태였다.
세월호에 대한 구조가 시작될 무렵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의 안전과 구호를 위한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자기 목숨만 챙겨 선체를 탈출해 버렸다. 또한 해양경찰과 해양수산부 그리고 정부 각 부처 등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곳에서는 기대되거나 요구되는 구조 활동을 전혀 전개하지 못했다.
온 국민이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는 가운데 선체 내 승객 구조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전원이 구조되리라는 예상과 기대는 단숨에 배반당했고, 한 명의 생존자만이라도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던 기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조 작업이 시작될 때 선체 안에 남아 있던 304명의 승객 가운데 구조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침몰된 지 한 달여가 지난 현재, 승객 구조 작업은 시신 수색 작업으로 전환되어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 1차 사건과 세월호 2차 사건
세월호가 침몰한 사건을 세월호 1차 사건이라고 하고, 1차 사건 이후 구조 작업이 시작된 다음의 과정을 세월호 2차 사건이라고 하자. 세월호는 더 많은 돈벌이를 위해 이뤄진 무리한 객실 증축과 구조 변경, 적정 용량의 세 배를 넘은 화물의 적재 등, 수많은 안전 지침과 관리 규정을 위반한 탓에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때문에 세월호 1차 사건은 세월호를 침몰시킨 범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호 선체의 머리 부분이 아직 수면 위에 있을 무렵, 선장과 선원들은 나 몰라라 서로 앞 다퉈 탈출을 시도했고, 해양경찰과 정부는 승객 구조가 가능한 골든타임을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보건대 당시 코앞에서 헬기가 떴고, 해양경찰이 달려가 구조 작업을 순조롭게 진행시킬 줄 알았다. 하지만 끝내 우리가 보게 된 것은 구조 과정이 아니라, 승객들이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침몰하는 배 속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생명들을 구조해 낼 일말의 가능성과 기회를 모두 놓쳐 버리고, 눈앞에서 모두 수장시켜 버린 처참함의 장면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세월호 2차 사건은 침몰 사건의 피해자 구조에 실패한 사건이자, 나아가 세월호 승객 ‘살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세월호 참사_구조자 “없음”
영화 〈한공주〉 이야기
한공주는 영화의 주인공, 열일곱 살 여고생이다. 영화는 공주가 전학 오는 날부터 시작된다. 공주의 표정과 말, 행동 그 어느 하나도 평범한 여고생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엔가 가격당하여 충격을 받은 결과, 마치 금방이라도 으스러지기 직전의 유리판과 같았다. 턱밑까지 물이 차올라 숨쉬기조차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끊임없이 자신을 뒤따라 다니는 어두운 그림자에 쫓기는 도망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공주를 쫓아다니던 검은 그림자의 실체가 드러난다. 공주는 이내 다시 깨어졌고, 깊은 악몽 속으로 빠져들었으며, 검은 그림자에 의해 완전히 포획당하고 만다.
세월호 참사와 영화 〈한공주〉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면서, 영화의 스포일러를 피하기 어려움을 양해하시라. 공주는 약물이 먹여진 상태에서 43명의 남자 고등학생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 전학 조치된 것이었다. 공주가 전학 온 학교로 몰려온 어른들은 바로 가해 학생들의 부모들이었다. 그들은 공주의 아버지가 일부 가해자들과 합의를 한 탓에 자기 아이들만 처벌을 받게 되어 신세를 망쳤다고 원망한다. 잘못한 것이 없는 피해자인 공주에게 조용히 숨어 숨죽이고 살기만을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 용서받지 못할 범행을 저지른 가해자의 부모들이 공주를 마치 사냥감처럼 쫓고 물어뜯는다.
그렇게 공주는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로서 트라우마(외상 후 정신 장애)를 치유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피해까지 입고서 강물에 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막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공주는 어둡고 차디차며 물살이 드센 강물 속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공주 1차 사건과 한공주 2차 사건
한공주 사건도 세월호 사건과 같이 두 개의 사건으로 구분될 수 있다. 공주(와 함께 일을 당하고 자살한 공주의 친구)가 피해 입은 성폭력 범죄 사건을 한공주 1차 사건이라고 부르고, 이후 공주가 받아야 할 보호와 배려를 받지 못하다가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기까지를 한공주 2차 사건이라고 부르자.
영화는 성폭력 범죄 사건을 다룬 다른 영화와는 달리 한공주 1차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서는 마치 스틸 사진과 같은 충격적인 몇 장면의 영상만으로 공주가 얼마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지를 보여 줄 뿐이다. 대신 영화는 공주가 1차 사건 후 겪게 되는 일들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1차 사건의 후유증으로 마치 방향키가 부서진 배처럼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없게 된 공주에게 현실의 물살은 거셌고 바람은 높았다. 잠시 물살이 약해지는 순간이 온 것도 같았지만, 현실의 바다는 여전히 차갑고 그 속은 어두웠다.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난파선 같던 공주 앞에 나타났던 어느 누구도 공주를 구해 내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공주를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일의 과정은 정작 피해 입은 공주를 구해 내는 과정이 아니었다. 공주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부작위(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는 행위)의 과정이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담임선생과 그의 어머니, 담임선생의 어머니와 재혼하고 싶어 안달이 난 야비한 파출소 소장, 합의금 때문에 자기 딸의 아픔과 생존 투쟁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친부,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자기 딸이 찾아오는 것까지 꺼리는 재혼한 친모, 무엇보다 자기 아들들의 장래만 생각하며 피해자인 공주의 아픔과 고통은 뒷전인 가해자 부모들. 이들 모두의 야비함과 야만이 공주를 죽이고 있었다. 심지어 공주를 모두 이해해 줄 것 같았던, 어렵게 새로 사귄 친구조차도 공주를 외면하고 만다. 공주는 ‘나의’ 입장만 생각하는 주변으로부터 방치당하다가 완벽하게 차단당했고, 그와의 연결마저 끊어져 버렸다. 때문에 한공주 2차 사건 역시 한공주 ‘살해 사건’이다.
# 응시
_”잘못한 게 없는” 공주는 도망치듯 전학을 당했다. 그러고 나서도 숨죽여 지냈다. 그러나 세상의 야비함과 야만은 다시 공주를 덮친다. 아니 원래 그들은 공주를 놓아 준 적이 없었다. 공주가 그 그림자를 두려움에 바라본다.
세월호 사건의 책임론
세월호 1차 사건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의 형사 책임을 묻기 위해 법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인 사실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독버섯처럼 증식해 가는 자본의 패악과 곁에서 그 증식에 기생하는 세력들의 전모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현재 상태로는 검찰과 법원이 사회적 공분이라는 제단 앞에 가능한 한 많은 양의 형사 처벌이란 향불을 피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1차 사건에 대한 단죄보다도 구조 작업을 실패한 2차 사건의 책임 규명 문제가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물론이고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도 다시 추락하고 침몰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생명을 경시하는 경제적 동물의 본성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구조 실패로 얼룩진 2차 사건은―1차 사건에서도 물론 그렇지만―개인적 차원을 넘어 제도와 정치의 문제이며, 그 최종 책임을 정부와 국가가 져야 한다.
따라서 세월호 2차 사건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구조 활동을 해야 할 자들의 책임 방기, 무능력, 소극적인 구조 방법, 구조 시 지휘와 관리 체계의 부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허위와 기만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아가 정부는 겉으로는 사과하는 체하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세월호 민심에 대해 과도하게 금압적 자세를 취하고, 어이없는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중적 태도를 당장 거둬들여야 한다.
한공주 사건의 책임론
한공주 사건의 경우에도 문제의 심각성은 1차 사건보다는 2차 사건에 있다. 1차 사건의 경우에는,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 범죄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회에서는 강력한 처벌 요구가 들끓으면서, 그 처벌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신상 공개와 함께 화학적 거세 또는 전자 발찌와 같은 신종 제재 수단들이 동시에 부과될 수도 있다. 가해자를 짐승처럼 대하면서 사회로부터 영구 격리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단말마적으로 터져 나온다.
그렇지만 그저 거기까지다. 꼭 필요한 그 이상의 대처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시간이 지나고 사건이 처리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다른 범죄도 마찬가지겠지만, 성폭력 범죄는 일개인의 어긋난 욕심은 물론이고, 성에 대한 사회의 이중적 잣대나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 및 교육의 부재 등 보다 근본적인 사회 구조적 원인 때문에 전적으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피해 입은 피해자에 대한 회복과 치유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으로만 달성되는 일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주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일은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나 피해자에 대한 물질적 보상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일을 넘어, 피해자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는 여타 범죄 사건의 경우와 달리, 회복을 위한 요구를 위해 피해자 본인이 전면에 나설 수 없다는 특수성도 있다. 때문에 피해자의 회복을 제도화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한공주 2차 사건에 대해서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게 공주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모른 체했고, 공주의 치유와 회복에 인색한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닌지 우선 자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우리도 은연중에 공주가 자기 목소리를 내며 자신감 있게 살기보다는 오히려 숨죽이며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능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반성하고, 공주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과 원호 및 보호 수단을 등한시한 점에 대해 각성해야 한다.
# 뭉크, 〈울고 있는 누드Weeping Nude〉, 캔버스 유채, 오슬로, 뭉크박물관 소장
_또 다른 공주가 저리 울고 있지는 않은가?
세월호 사건의 처리론
세월호 사건에서 구조에 늦었던 정부는 세월호 민심을 통제하고 단속하는 일에만 빨랐다. 실책과 무능을 숨기기 위해 국민이 하고 싶은 말조차 못하게 하는 일을 그 어떤 대책보다 앞세우고 있다. 게다가 국민의 안전과 생존에 대해 무한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가 사건의 법적 책임을 묻는 일만 크게 부각시켜, 그것으로 사건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정부는 중앙에 컨트롤타워를 만들고 철지난 국가 개조론을 들춰내 선전함으로써 그 책임을 다한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성급한 국가 개조론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다. 정확한 현실 진단과 그에 근거한 방향 제시 없이 날조되는 국가 개조론은, 마치 고장된 기체의 원인과 현 지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기장이 하늘로 향해야 할 기체가 바다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하강 레버를 당겨, 결국 기체를 바다로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비극적 결말을 가져올 수 있다.
한공주 사건의 처리론
한공주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해자의 불법의 크기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근거로, 보다 가혹한 대응을 정당화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죽어가는 공주를 살려 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주가 진정으로 원하는 요구와 필요에 귀 기울여, 그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일이다.
법은 한공주 1차 사건과 같은 유형의 사건을 ‘처리’하는 방안은 제시하고 있다. 특히 법은 최근 성폭력 범죄를 모두 비친고죄화 함으로써 합의금에 눈이 먼, 공주의 친부와 같은 사람의 이기심이 들어설 땅을 없앴다. 또한 가해자의 부모들이 자기 자식의 장래를 위해 합의를 해주지 않는다고 공주에게 아귀처럼 들러붙어 악다구니를 벌일 가능성도 제거했다. 뿐인가.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미디어는 떠들썩하게 피해자에 대한 물질적, 의학적 또는 정신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정부는 정부대로 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고 있는 것처럼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춘다.
하지만 사건이 잠잠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 크고 요란했던 모든 소리는 종적을 감추어 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법이 공주의 트라우마를 치유하여 그녀의 정신과 마음을 감싸고 보호할 만큼 섬세한 촉수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 눈물
_공주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누가 그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누가 그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누가 분노와 공감의 눈물이 흘러간 자리에 ‘법法’의 이름을 제대로 새길 수 있을까?
세월호 사건과 한공주 사건의 해결론
세월호 사건과 한공주 사건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이러한 유의 사건이 생길 때마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하면서 개인적 차원에서 도덕과 윤리의 회복을 강조하곤 한다. 여론을 주도하는 자들은 물론이고 미디어들도 이런 식의 반응을 조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반성문을 제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지금은 아무리 뼈저릴지언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도덕적 자성은 무디어지고 만다. 실제로도 아무도 책임지는 자가 없고, 그 어떤 제대로 된 해결 방안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세월호 사건이나 한공주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개인적 차원에서의 처벌이나 도덕과 윤리의 회복을 강조하는 일이 무망함에 덧붙여, 법의 역할 또한 기대할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특히 이 영화 〈한공주〉를 보고 나오면서는 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극도의 허망함과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법은 본디 사건의 ‘처리’ 수단이지 ‘해결’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은 강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공주를 구해 내는 구조법을 적어 두고 있지 않다. 법은 공주로 하여금 강물로 뛰어들게 만든 모든 상황을 바꿀 수도 없다. 법의 힘만으로는 공주를 살릴 방도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공주 사건과 닮은꼴인 세월호 사건이 우리에게 그 해법의 실마리를 던져 놓고 있다.
생명 가치의 복원
주지하다시피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매우 빨리 그리고 확실하게 너무나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한 가지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할 곳이 ‘자본’이 아니라 바로 ‘생명’임을 일깨워 준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생명보다 자본을 앞세웠기 때문에 사람을 무한 경쟁의 구도와 신자유주의의 수레바퀴 아래로 밀어 넣었고, 신속성과 효율성 그리고 경제성의 늪 속으로 밀어 넣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생명 경시의 배후 세력이 자본의 끊임없는 증식 욕구에 편승하기 위해 자본 권력과 결탁한 정치권이며, 그러한 정치권의 득세에 힘입어 사회와 국가가 나아가야 할 청사진을 잘못 그린 정부와 국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요컨대 세월호 참사는 자본과 권력의 유착을 선체로 하고, 불법과 편법의 방향키를 움직이며, 세월호에 갇힌 이 땅의 생명들을 무참히 희생시킨 ‘국가 폭력의 프레임’을 폭로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보면 세월호 참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무고한 생명들을 무참하게 빼앗아갔지만, 이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방안이 생명의 가치를 복원시키는 일임을 자각시켜주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호소하는 바는, 노동 현장에서 효율성을 앞세운 대량 해고, 산업 현장에서 이윤에 눈이 먼 생명 경시, 복지의 탈을 쓴 탐욕의 제국 확대, 개발 독재를 연상케 하는 용산 참사와 밀양의 비극, 교육 현장에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벌어지는 경쟁 등, 수많은 생명들을 희생시키는 ‘야만의 프레임’을 되돌아보게 한다.
여기서 희생된 피해자들은 법적으로 따지면 모두 타살된 피해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피해와 희생에 대해서는 ‘살해’라는 법적 평가 대신, ‘자살’ 또는 ‘질병’이라는 레토릭이 사용될 뿐이다. 그 결과 이들의 생명은 사실상 타살로 희생된 것이지만, 법적으로 살인죄로 처벌되는 자가 아무도 없다. 그렇다. 이들은 죽임을 당해도 일말의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 벌거벗은 생명)’인 것이다.
# 노란 리본
_공주를 살려 내라, 아이들을 살려 내라!
공주를 살려 내라
세월호 참사에서 세월호와 함께 방치되어 차갑고 어두운 바다 속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희생자 전원도 호모 사케르이다. 그리고 호모 사케르를 태우고 침몰하고 있는 배는 비단 청해진 해운 소속의 세월호만이 아니다.
경제 위기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배도 신자유주의라는 바람에 편승한 채, 민생과 경제 활성화라는 목표에 맞춰 대폭 구조 변경되고 증·개축되었다. 그래서 효율성과 경제성이란 과도한 적재물을 쌓고 자체 복원력마저 잃어 버렸다. 정치권이 경제 활성화와 민생이라는 명목 하에 추진하고, 정부가 신자유주의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구실로 밀어붙인 일련의 행태들을 통해 자본 세력만 더욱 배를 불렸다. 그와 유착된 소수의 정치 세력들의 얼굴도 갈수록 번지르르해져 간 사이, 이 땅에서 힘없고 돈 없는 약자들은 하나둘 세월호에 승선하고 있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세월호 참사가 보여 준 생명 배제의 ‘국가 폭력의 프레임’과 ‘야만의 프레임’을. 이를 혁파해 생명의 가치를 복원시키지 않으면 세월호 참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그리고 법학자들은 지금껏 현실 정치에서 보란 듯이 작동되고 있는 생명 배제의 메커니즘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그 내적 논리를 제공한 경우도 많았다. 생명의 가치를 짓밟는 ‘희생양 프레임’의 내적 구조 개선을 하지 않으면, 세월호에 갇힐지도 모를 생명은 예외 없이 호모 사케르가 되고 만다.
영화 〈한공주〉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숨죽여 살아가고 있던 공주도 세월호 프레임에 갇힌 한 생명이다. 세상으로부터 배제된 채, 공주는 편견의 망망대해에서 주변의 이기심과 무관심으로부터 구조되지 못하고 생명을 잃어 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았다. 공주는 이렇게 호모 사케르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외친다. 공주를 살려 내라!
김성돈(본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법과 다른 세계와의 만남에 관심이 많아, 몇 해 전 『로스쿨의 영화들-시네마 노트에 쓴 법 이야기』이란 책을 통해 법과 예술, 현실과 꿈, 제도와 이상 사이의 애증 관계를 논했으며, 오스트리아의 진화생물학자 프란츠 M. 부케티츠의 『도덕의 두 얼굴』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도덕의 이중성’을 목도하고 경고했다. ‘사람의 성장 못지않게 법의 진화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대중간의 행복한 소통을 법학자로서의 화두로 삼고, 우리 사회의 모순된 법률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