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은 미술관은 좋아하는 작가나 유명한 작가의 전시회가 아니었다. 미술계에 관심이라곤 1도 없었다. 유명한 작가도 아니고, 미술에 관심도 없는데 미술관에 왜 갔냐고? 나는 '미술관에 한 번쯤은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뭐, 다른 이유도 있었고. 미술관이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생각이 잘못되었던 걸까. 희미하게 남은 작품 2~3개, 귀찮은 감정을 이기고 찍었던 사진을 제외하곤 느낌과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작품을 생각하려고 했다. 이 작품이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 만든 걸까? 혼자 질문을 곱씹었지만 생각할 자양분이 없었다. 나는 '잘' 몰랐고, 작품을 있는 그대로 느낄 준비도 부족했다.
나는 미술관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 미술관 작품에 눈이 가지 않으니 사람들에 눈이 가더라. 그렇게 알게 된 두 가지 현상. 첫째, 미술관은 조용하다. 둘째, 사람들은 사진만 찍는다.
조용한 미술관과 사진
당연히 미술관은 조용해야 할까? 미술관은 공공장소다. 미술관과 술집은 무조건 달라야 하나? 조용한 미술관을 만드는 고정관념이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미술관을 많이 가는 사람 = 교양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소리 높은 대화를 자제하고, 끈질긴 질문을 지양해야 한다. 감상은 혼자서 조용히 해야 한다. 이런 고정관념은 미술관을 가장 성찰하기 좋은 장소로 만들 수 있다. 작품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데도 가장 좋을 수 있다. 다른 감각의 방해가 없이, 오감이 예민해지니까.
그런데 미술관이 조용한 이유가 모든 관람객이 작품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며 성찰하고, 있는 그대로 작품을 느끼기 때문인가? 그런 사람도 있다. 하지만 현대 미술관이 온전히 절 같은 성찰의 장소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의 미술관은 상업 영역과 깊은 연관이 있다. 현대 미술관이 이윤을 벌어들이기 위한 장소의 의미를 지니니 방문객들이 사진만 냅다 찍으러 오는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그림을 잘 알거나 진짜 느끼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술관은 어떤 장소일까? 미술관이 사진 찍으러 가는 장소라면, 사진이 없을 때 미술관은 왜 존재했을까? 역사적으로 미술관은 작품으로 화가와 교감하고, 삶의 자세를 성찰하는 장소를 제공했다. 사람들이 작품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자신의 삶에 맞게 작품의 의미를 재해석했기 때문에 미술관은 존재했다. 하지만, 2017년 한국의 미술관에서 사람들은 작품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쁜 사진 찍기에 집중한다. 우리는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는 것일까, 사진에 나온 나를 작품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는 미술관이 안겨줄 수 있는 충만한 감각적 만족과 생각을 제물로 예쁜 배경을 얻는다.
누군가는 미술관에서 교감하고, 의미를 찾아야 하냐며 반문할 수 있다. 공간의 용도는 '나'가 해석하기 나름 아닌가? '나'가 미술관보다 주체가 되는 현상은 당연하지 않나?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사진만 찍고 나와도 된다. 하지만, 미술관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화가와 작품으로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는 그 특성을 활용하여 내적 성장을 시도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조용한 미술관과 교양
나는 '교양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심리가 미술관을 조용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미술관에서 교양 없는 사람은 어떤 양상을 띌까? 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교양 없는 사람' 압박을 비판한다. 알랭 드 보통은 1) '작품을 모르는데 질문하지 않는 사람' 2) '교양이 없어서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이 관찰을 토대로 '교양 없는 사람 = 알려고 질문하는 사람'이라는 등식을 얻는다. 질문을 120DB로 하진 않을 텐데, 사회가 정한 공간의 의미는 질문을 '시끄러운 말'로 만든다. '교양 없는 사람' 압박은 사라진 생각을 낳는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수업시간에 질문하는 사람들을 '용기 있다'라고 표현하고,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묻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긴다. 미술관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는 모르면 물어봐야 한다고 얘기하면서 여전히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가? 어떤 분야든 조금이라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다. 질문을 두렵게 만드는 고정관념은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우리는 교양의 폭력을 생각하지 못한 채, 어느 곳에서든 조용하다.
예술은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도 미술관을 조용하게 만든다. 위계질서의 굴레에 꽉 잡혀 있는 우리는 위대한 사람들의 작품을 쉽게 왈가왈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에게 던지는 의문을 '해서는 안 될 일'이라 여긴다. 예술은 당대의 가치 체계를 고민하고, 규범을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분야 아닌가? 예술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결코 신성시하는 작품은 없어야 한다. 뛰어난 작품은 있을지라도 얘기할 수 없는 작품은 없다. 그 사람과 내 생각이 다를 뿐이다.
예술이 왜 신성한 건데? 뒤샹이 제시한 의문이다. 예술은 오랜 작업 끝에 만들어져야만 한다는 철학을 박살 낸 '샘'. 작품이 되는 변기를 누가 생각했겠는가? 변기는 왜 샘일까? 뒤샹이 기성품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산하는 생각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뒤샹의 다른 작품 <L, H, O, O, Q>를 생각해보자.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리질 않나, 모나리자 엉덩이가 뜨겁다고 얘길 하지 않나? 뒤샹은 작품 하나로 성찰을 유도한다. 모나리자, 아비뇽의 처녀들, 최후의 만찬처럼 위대한 작품을 보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사실 이 글을 쓰는 나도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잘 모르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우리는 위대하다고 여기는 작품을 신성하게 생각한다. 도대체 왜?
질문하면 교양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미술관. 사진의 노예로 전락한 미술관. 우리는 규범과 고정관념에 갇혀 예술을 잘못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을 알아야 하나?
혹자는 의미를 추구하려면, 아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냐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지적에 동의한다. 그런데, 예술에서 '아는 것'은 무엇인가? 음악을 예시로 '아는 것'을 생각해보자.
많은 분들이 윤종신의 좋니를 들어봤을 것이다. (다른 노래로 예시를 생각해도 된다.) 우리가 좋니에 이해나 공감을 하는 이유는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좋니를 기술적으로 평가하라고 요청한다. 우리는 '알지 못해서' 침묵한다. 우리는 좋니를 알면서 알지 못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모순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앎'이 다른 의미라는 사실을 안다. 음악을 느낄 때 우리에게 필요한 자양분은 이론 같은 규범 지식이 아니라 경험과 감정이다.
이론을 알아서 노래가 좋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환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왼쪽에 좋니를, 오른쪽엔 그림을 이론 지식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곡 구성이, 악보가, 단조가, 색채가, 입체파가 … 우리는 처음엔 흥미를 가지다가, 곧 그 자리를 뜨고 싶어질 것이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는 척 적당히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론 지식은 대중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예술이 애초에 지식과 논리로 접근하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예술이 오감 이미지로 다가와 생경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좋다고 얘기한다.
지식이 있어야만 예술이 존재하진 않는다. 현실에서 우리가 작가의 메시지와 삶을 비교하고 성찰하는 데 지식은 필요하다. 무비판적으로 신성시하는 위대한 작품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음, 예쁘군.' '내가 만들긴 어렵겠는데?' 의미를 생각하려 해봐도, 그 안에 담긴 스토리나 철학을 모르니 생각은 옅어진다. 예술은 그 자체로 무(無) 목적성을 띨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의 목적성을 생각해도 예술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역사를 이해하면 미래가 보이듯 미술사를 알면 작품의 흐름이 보이지 않을까? 작가의 시대 배경을 이해하면 그림이 의미하는 바를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평론가들의 의견과 달리 작가의 의도를 재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교훈을 나와 사회에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창조에도 지식은 필요하다. 뉴스에 등장하는 5살 천재 꼬마 미술가 같은 사람은 극히 예외다. 천재 꼬마는 이론을 습득하지 않았다. 천재 꼬마는 예술에 '지식이 필수가 아니라'라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피카소는 첫 작품인 <첫 영성체>에 입체파의 철학이 아닌 사실주의 철학을 담았다. 입체파와 추상 그림으로 유명한 그가 사실주의로 시작했다니? 어린 시절부터 피카소는 사실주의를 충분히 학습했다. 하지만 사실주의가 현상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입체파 운동은 사실주의를 충분히 학습한 뒤 일어났다. 기존 규범의 학습이 없었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 규범의 학습을 전제한다는 명제는 어디든 적용된다.
청색시대나 입체파에 속한 화가, 사실주의 작품을 암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맹목적인 암기는 예술의 본질을 파괴한다. 생경한 느낌과 생각은 멀리 던져버린 채 평론가의 해석이나 범주화된 지식으로 예술을 느낄 수 있을까? 남의 의견과 건조한 논리를 예술이라 생각하는가? 지식, 규범, 이론에 매몰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예술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댓글만 보고 기사를 판단하는 사람들이랑 다를 바가 뭔가? 고급스러운 용어를 아니까 다르다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나는 조용한 미술관을 만드는 고정관념을 생각해보고, 예술의 의미를 찾는데 필요한 자양분을 얘기했다. 글을 읽은 분들이라면 말하려는 소재가 미술인지 예술인지 헷갈릴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내가 주장하는 모든 얘기는 '예술'로 분류되는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피카소는 그림이 일기의 다른 표현 방식이라고 얘기했다. 다른 예술 분야도 일기의 다른 표현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노래든 그림이든 도자기든 표현한 생각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 자극을 주고, 새로운 생각을 낳는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생각은 썩는다. 새로운 방식으로 '나'의 일상을 표현해보는 것은 어떤가? 경험과 생각이 중요하다. 미술관을 가든, 음악을 듣든, 대화를 하든 우리는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 일상에 도태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찾는 힘. 우리는 일상을 재창조하는 예술을 해야 한다.
덧붙여
사실 글을 다 쓰고도 두렵다. 현장을 제대로 못 담은 것은 아닐까. 관찰에 실패한 것은 아닐까. 더불어, 주변 사람들은 내가 미적 감각이 많이 떨어진다고 알고 있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이 글을 쓸 자격이 없다고 얘기할 수 있다. 나는 부족한 미적 감각과 예술을 마주하는 자세를 얘기하는 것은 별개라 생각한다. 더불어, 개인의 특성이 글의 타당성과 메시지에 권위는 부여할지라도 논리적 증명을 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랬듯, 이 글을 대화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잘못된 관찰이 있다면 바로잡고, 공감하면 생각해보는 그런 대화. 언제나, 책을 직접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 글은 제 블로그
https://blog.naver.com/davichi023/221337788561
https://blog.naver.com/davichi023/221337789327 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