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번민하는 이들이게 건네는 말, ‘오르부아르(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이 책은 외형부터 흥미로웠다. 책에서 가장 먼저 시선이 가게 되는 곳은 표지이기 마련인데, 앞표지에는 책 제목과 함께 말 머리를 뒤집어쓴 한 사내가 그려져 있다. ‘책 제목의 의미는 무엇이고, 말 머리는 무엇을 의미할까?’ 첫 번째 든 의문이었다. 그리고 한눈에 봐도 전공책처럼 두꺼워 보이는 이 장편소설은 무려 600페이지가 넘었다.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 두 번째로 든 의문이었다.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읽기 시작한 오르부아르는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이 책의 배경은 프랑스로 세계 1차 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끝나고 난 뒤 군인들의 사회에서의 삶을 다루었다. 주인공은 알베르, 에두아르, 프라델, 세 명으로 이들은 모두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전쟁을 통해 몸과 마음에 무수한 상처를 입고 제대한 군인들이라면 프라델은 전쟁을 통해 엄청난 이익을 얻은 군인이라는 점이다.
책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한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당시 중위였던 프라델은 대위로 제대하고자 전투에서 공을 세우려 한다. 이에 자신 부대의 군인 두 명을 자신이 의도적으로 죽임으로써 부대원들의 독일군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켜 전투를 승리로 이끌려고 하는데, 이를 알베르가 알아채고 만다. 프라델은 알베르를 포탄 구덩이에 밀어서 떨어지게 하고, 구덩이에 갇힌 알베르는 불행하게도 근처에서 터진 포탄으로 인해 흙더미가 밀려들어와 묻히게 된다. 이를 지켜본 에두아르는 그를 가까스로 구하지만 얼굴에 포탄 파편을 맞고 코 아래로 뻥 뚫린 구멍을 갖게 된다. 자신을 구하려다 그렇게 된 에두아르에 대해 알베르는 책임감을 느끼고 그를 돌보는데, 에두아르는 권위적인 아버지를 피해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이에 알베르는 그의 신분 위조를 돕고 에두아르는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
알베르가 포탄 구덩이에서 흙더미에 깔렸을 때 말 대가리와 처음으로 대면한다. 흙 속에서 그는 말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넣고 몇 모금의 숨을 얻었던 것이다. 이 이후로 그는 에두아르에게 말 대가리 그림을 그려달라거나 에두아르가 만들어준 말 대가리 마스크를 소중히 여기는 등 집착을 보인다. 아마 그는 이 말 대가리를 자신에게 생명과도 같았던 몇 모금의 숨을 준 은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과 그것을 동일시하는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생각건대 이는 전쟁에서 무참히 죽어 대가리만 남게 된 말이나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독일군도 아닌 아군에게 배신당해서 흙더미에 깔려죽게 된 알베르 자신이나 그 처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말하자면 사람이나 말이나 모두 전쟁의 ‘소모품’으로 취급받던 시대였던 것이다. 이는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군인들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다. 알베르는 회계원으로 다니던 은행에서 다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온갖 궂은일을 해야 했고, 에두아르는 흉측한 얼굴로 밖에 나갈 수조차 없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부상당한 군인들의 가난을 당연시했다. 프라델 같이 전쟁을 이용하는 장사꾼들은 그 수단과 방법이 윤리적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죽은 자들은 영웅으로 취급하고, 살아 돌아온 자들은 뒤에 숨은 겁쟁이라며 대우해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에두아르와 알베르가 전사자 기념비를 통해 전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계획한 것은 어떤 면에서 공감이 갔다. 어차피 모든 것이 비정상인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에두아르와 알베르가 사기에 성공해서 큰돈을 얻게 되었을 때, 통쾌한 희열이 독자인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그 과정에서 프라델이 몰락하는 것도 통쾌함에 한몫했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전형적인 권선징악 결말을 냈지만, 그 내용의 구성과 짜임새가 치밀해서 진부하지 않았다. 또한 마지막에 에두아르가 프랑스를 떠나려던 날 천사 날개옷을 입고, 자신의 얼굴과 똑같은 가면을 쓰고 자신이 그렇게도 미워했던 아버지의 차로 달려들어 자살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우연히도 자신의 차에 뛰어들어 ‘진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어쩌면 너무도 놀라운 일이기에 슬픔보다도 운명의 큰 흐름으로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결말을 보고 난 뒤, 책을 덮으면서 ‘오르부아르’라는 제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르부아르’는 프랑스어로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어쩌면 반전과 놀라움을 거듭한 이 대사기극, 대서사극의 제목으로 너무 애상적이지 않나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보니 작가가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것이 바로 삶과 죽음의 문제였던 것 같다. 전쟁에서 죽고 죽임을 당하고, 아군에게 배신당하고, 누군가를 구하고 누군가는 부상당하고, 몸은 살았지만 영혼이 죽고, 죽은 자들을 신성시하고 산 자들을 냉대하고 등등의 일이 소설 속 이야기 전개에 하나하나 녹아있다. 어쩌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상 속에서만 해당하는 번뇌이고 고통일 것이다. 이에 작가는 삶과 죽음에 대해 번민하지 않아도 되는, 세속적인 야망과 욕심에서 벗어난 세상인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슬픈 죽음을 맞이한 소설 속 인물인 에두아르와 실제로 세계대전에 참전했었던 모든 군인들에게 바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