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인 올리버 트위스트는 필독서 리스트라면 출처가 어디든, 대상이 누구든 빠짐없이 등장하는 명작이다. 어렸을 적 영화로 먼저
소설을 접했던 나로서는 행복한 결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권선징악이라는 참으로 보편타당한 교훈을 주는 결말이었다.
드라마나
소설의 주인공은 입체적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모순적이지만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단면적이다. 악인은 끝까지 악인이며 선인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선함을 잃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불우한 유년기와 경제적 궁핍은 일탈과 범죄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마땅한 일자리나 사회적인 보호망이 없으니
법이나 도덕의 경계 밖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파진이나
아무런 죄책감 없이 소매치기를 하는 아트플 도저의 선택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올리버 트위스트는 소설의 초반부터 결말까지 선한 본성을 간직한다. 도둑들의 소굴에 던져
졌을 때도. 외롭고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상황에서 배를 곯을 때도 악에 동화하지 않고 착한 성품을 간직한
기특한 주인공으로 자란다. 진부하지만 출생의 비밀도 밝혀졌겠다, 올리버는
아버지의 유산도 받고 착하고 잘사는 노신사의 양자가 된다. 최후의 승자는 선한 사람이다 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결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 모든 사람이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는 못하며 그저 선함과 노력만으로 더 나은 삶을
쟁취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출간되었던 1838년에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는 두가지의 길을 걷게 된다. 구빈원과
같은 사회적 시설 속에서 천천히 굶어 죽거나 길거리에서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빠르게 굶어 죽는 것 말이다. 물과
같은 귀리 죽이 나라가 주는 최대한의 보호인 것이다.
따라서
올리버 트위스트의 해피엔딩은 이상한 불편함을 이끌어낸다. 한 편의 동화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와 그외의
악인이라 칭해지는 사회적 빈곤층의 모습이 극명하게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그저 한 권의
소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고발하는 투고문과 가깝게 느껴진다. 19세기 영국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중,상류층에서 세금을 거두었는데, 이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제정된 법이다. 내용은 빈민을 구제하는 비용을 절감하고 자활을 위해 빈민의 노동을 장려함으로써
결론적으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거지들을 없애자는 것이다. 나에게는 앞뒤가 맞지 않게 느껴진다. 이들이 말하는 노동의 장려는 구빈원이나 감화원과 같은 수용소의 강제노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모든 빈민층이 수용소에 끌려간다면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자는 목표에는 달성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겠다. 참 눈가리고 아웅이 따로 없다.
이렇듯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산업혁명의 뒷모습을 비판한 올리버 트위스트는 당시 대중의 큰 공감을 얻었다. 중류계급부터 빅토리아 여왕가지 이 책을 읽었으며 빈곤층조차도 이 책의 대출료를 모아 책을 빌려 읽었다고 하니 당시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시대를 불문하고 널리 사랑받는 책의 공통점은 그 시대와 공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속에 담긴 현실은 대중의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이러한 독자의 공감이 결국 그 책의 힘이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