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멋진 신세계>, 그리고 <우리들>을 묶어서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안 읽을 수가 없었다. 다른 두 권에 비해 이 책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러시아에서는 출판이 금지되어서 다른 나라에서 먼저 출판되었고, 또 비서구권의 비교적 유명하지 않은 작가의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세 권 중에서 가장 일찍 나왔으며, 나머지 두 권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책의 줄거리는 크게 <1984>와 다르지 않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말살된 전체주의 체제에 반항하는 주인공과 주인공을 돕는 여자 조력자, 전체주의 체제에서 군림하는 독재자와 결국 순응하는 주인공 등 비슷한 요소가 많다.
‘200년 전쟁’ 후에 황폐화된 지구에 생존자들이 세운 나라인 ‘단일제국’에서 일하는 주인공 D-503은 수학자이며-그러나 철학적인 이야기도 굉장히 많이 한다- 우주선 ‘인쩨그랄’의 조선 담당 기사이다. 전체주의 체제가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하다고 판단한 단일제국은 우주선으로 다른 행성의 사람들도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가져서 우주선을 만들고 있다. 주인공은 우주선에 실을, 단일제국에 대한 글을 남기라는 지시에 따라 글을 적고 이 글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은혜로운 분>이라는 독재 하에 단일제국은 철저히 사생활이라고는 없다. 모든 사람, 즉 ‘번호’들의 행동이, 심지어 음식을 씹는 횟수까지, 단일제국의 시간표에 의해 정해지고 사람들은 유리 건물에서 생활한다. 성생활도 각자의 호르몬에 맞게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데, ‘등록’이라는 이름을 갖고 거의 기계적으로 실행된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퇴색되고, ‘이 사람은 저에게 등록되었어요.’ 등의 말로 표현된다. 처음에 주인공은 수학자답게 기계의 부속품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에서 단순화된 원과 곡선의 움직임을 느끼며 희열을 느낀다. 또 2x2=4라는 식, 입방체 모양의 깔끔한 건물, 바깥세상과 단일제국을 나누는 벽 등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는 I-303이라는 여성을 만나면서 서서히 이러한 믿음에 균열을 느끼기 시작한다. I-303은 전체체제에 반대하는 모임인 ‘메피’의 일원이고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이 목표이다. D-503은 I-303에게 이상한 끌림을 느끼면서 그를 위해서 지각을 하고 일탈을 하는 등 변하는데, 사회적으로 이것은 질병이며 환각 증세이고, 그에게 ‘영혼이 생겼다’는 진단을 내린다. D-503은 I-303을 지독하게 사랑했지만, I-303도 같은 감정을 느꼈는지는 흐릿하다. 그가 D-503이 인쩨그랄과 연관된, 중요한 직위의 사람이고 그 우주선의 시범 운행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 우주선을 메피의 이익에 맞게 사용하기 위해 D-503에게 접근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진심은 정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메피의 구성원들은 ‘만장일치의 날’에 반대 손을 들고 우주선을 뺏으려는 등 몇 번의 반항을 시도하지만 흐지부지되고 결국은 고통스럽게 죽어나간다. 반면 D-503은 바깥세상까지 다녀와서 국가체제를 엎으려는 계획에 동참했지만 번호들의 사상을 굳건히 하기 위한 수술에 끌려가게 되고, 그는 다시 처음의 이성적이고 체제에 순응하는 수학자로 돌아와서 그가 사랑했던 I-303을 보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게 되며 체제의 반항자들을 빨리 처단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 내용의 구성과 작품성은 <1984>가 마음에 들지만, 철학적이고 수학적인 개념이 나오고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넘나들며 파격적으로 서술한 이 책은 확연히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이 책은 <1984>와 <멋진 신세계>가 보여주지 못했던, 전체주의 체제에 반항하고 처음으로 사랑과 개인 차원의 존재와 영혼이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주인공 D-503은 I-303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사회 체제상 사랑은 곧 스스로의 파멸이라는 두려움을 반드시 수반된다. 따라서 I-303은 마냥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의 신으로 그려지는 대신 검은 십자가, 무섭도록 하얀 이빨, 날카로운 삼각형 등의 수식어로 설명된다. 또한 책은 엔트로피와 에너지의 개념을 들기도 하는데, 엔트로피는 조화, 균형을 지향하는 힘이고 에너지는 반대로 평형을 파괴하고 운동하려는 힘이다. 그리스도교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단일제국은 엔트로피를 숭배하며, 과학만능주의와 합리주의, 전체주의를 통해 모든 사람이 거대한 사회란 기계의 부속품으로만 존재하는, 즉 행복과 비자유가 100% 양립하는 사회를 건설한다. 게다가 조화와 균형을 지향하고 운동하는 힘인 에너지를 부정하니, 모든 것은 결국 유한하다는 논리도 숨어있다. 이것은 ‘무한성’이라는 개념이 사회 체제를 부정하는 논리로 쓰이는 발판을 놓는다.
역시 디스토피아 소설답게 주인공이 단일제국의 의사들에게 끌려가서 개인성과 영혼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 결말로 끝난다. 그러나 평소에 디스토피아 소설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묘사를 주로 좋아했다면, 이 책은 그에 반항하는 개인의 내면적 투쟁에,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여러 분야에 걸쳐서 설명할 수 있는지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