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를 기억하다
때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소위 '일진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혔던 친구가 갑자기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를 외면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욕을 먹으면서 안부를 묻고, 대화를 했다. 고등학교를 입학할 무렵 그 친구는 나에게 정말 고마웠다고 얘기했다. 우아한 거짓말의 화연을 만지가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화연은 천지를 되감기 한 비디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 친구를 도와주었던 기억은 몇 안 되는 중학생의 가치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다른 왕따들에겐 하지 못했던 기억. 사과의 대상은 명확하다.
내가 알던 왕따들은 천지처럼 똑똑한 반격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생각해 볼 주제는 우리의 부끄러움에 관한 것이지, 소설과 다른 현실의 관계가 아니다. 똑똑한 반격을 가하지 않은 왕따들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미라처럼 거드름 피우지 않았다고, 화연처럼 직접적으로 괴롭히지 않았다고 책임이 없는 걸까. 우리는 말을 삼켰을 뿐 미라나 화연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소설에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에 집중해야 한다. 배경처럼 스르륵 흘러가는 사람들. 등장인물로 언급되지 않는 사람들. 배경 같은 ‘반 아이들’. 잘못을 뒤엎을 능력이 없는 아이, 설령 있더라도 나서기 싫어하는 아이. 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럼 넌 다시 돌아가면 어떡할 건데?”
“그럼 넌 다시 돌아가면 어떡할 건데?” 숨을 턱 막히게 하는 질문이다. 현재에서 과거의 행동을 바꿀 순 없다. 그런데도 옛날을 묻는다. 7번째 내가 죽던 날처럼 과거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면 행동을 바꿀 거냐."라는 질문에 “아니, 그래도 방관자이지 않을까.”하며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분명 우리는 잘못된 상황을 알고 있었다. 분노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뱉음으로써 지켜야 할 책임이 적을 만들고, 자신을 피곤하게 할 것이란 사실 또한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단체 생활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정의를 지키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인간관계의 단절, 감정 소모, 법적 분쟁의 대상자 등 여러 형태를 띠지만 결국 ‘책임’으로 개념은 통합된다.
따돌림을 당했던 사람들에게 안부를 물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안부를 묻는 행위는 “친하게 지내자."라는 의미와 비슷했다. 관계를 잃는 우를 범할 수 없었다. 가치와 이기의 대립에선 이기가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이 답변의 솔직함엔 높은 평가를 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모든 걸 덮진 못한다. 그 답변엔 “부조리엔 분노해야 한다."라는 당연한 판단이 없다. 결국 우리는 책임지기 싫었던 것이다. 음주운전 전력을 청문회 전에 공개한다고 해도, 음주운전한 사실이 달라지겠는가.
나머지는 “당연히 학교 폭력 근절에 앞장서고, 가해자들한테 똑바로 얘기했겠지!”라며 얘기할 것이다. 정의의 사도는 언제나 바람직하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 던진 그 멘트가 어떤 소용이 있을까. 그 말은 책임지는 척하고 있지만, 책임이 없는 말이다. 다 끝난 얘기니까 쉽게 할 수 있는 얘기다. 한 마디로, 역겹게 우아한 얘기다. 침묵과 우아한 거짓말은 왕따들에게 억울한 책임을 떠넘겼고, 선생님들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보상으로 학교는 깨끗함을 받았다. 교육청은 이미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우아한 명패, 철학의 부재, 고통받는 친구들, 책임 없는 말들. 그리고 나. 우아함은 조직적인 폭력을 띠었다. 그 우아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두 알고 있는 진실, 미소는 운이 없었다. 소름 끼치는 집단 회피, 미소 아니면 나일 수도 있다.’ (214)
미라의 끔찍하리만큼 정확한 판단이다. 역겨움이 드러나는 순간은 어쩌면 한 끗 차이였을지 모른다. 그들은 운이 없었고,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아 집단 회피에서 벗어난 방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더 운이 좋게도 그들이 자살하지 않았기에 우아한 거짓말은 더욱 판쳤다. 천지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200페이지의 소설은 쓰이지 않았다. 지금 각자의 위치에서 잘 살고 있으니 끝난 걸까. 어쩌면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뤄진 건 아닐까.
그러니 사과를 해야 한다. 너무 늦지는 않았을까, 옛날의 방관을 지금 넘을 수 있을까. 그래도 찾아봐야겠다.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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