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의 사회주의 : 원리는 무엇이고, 가능성은 어떤가?
왜 인간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가
『우연과 필연』을 본격적으로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우리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시작됐을까?”라는 질문을 거의 던지지 않는다. 전문지식과 장비도 없고, 생각만으로는 쉽게 답을 내릴 수도 없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다. 인간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별 상관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눈을 일상에서 사회로 돌려야 한다. 특히 사람들 간의 논쟁에 주목해야 한다. 논쟁의 근원이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고, 질문의 답이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의 노예관을 살펴보자. 몽테스키외는 흑인들의 코가 납작해서 동정하기 어렵고, 흑인들이 유리 목걸이를 중요하게 여겨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몽테스키외는 흑인을 인간으로 여긴다면, 스스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의심이 생기기 때문에 절대 흑인을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두가 노예제는 필연적인 사건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때는 몽테스키외의 주장이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런 이해를 근거로 노예제도는 정당화를 갖추었고, 노예제에 어울리는 계급 문화도 생겨났다.
인간을 이해하는 관점은 유일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사상은 대립해왔다. 사상의 대립은 세력의 충돌로 드러났다. 노예제 폐지, 사형제 폐지, 종교 전쟁 등 충돌의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세력 간의 갈등은 화합하든 전쟁을 하든 어떻게든 끝이 났다. 그 결과, 하나의 사상만 체계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사상은 존재하더라도 제도화되지 않았거나 다수를 차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향력이 미미했다. 현재 사회도 폭력적인 방식이 수반되지 않을 뿐 그런 과정을 똑같이 거치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은 무엇이었는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모노는 기존의 사고체계를 지배했던 생기론과 물활론이 객관적이지 않은 연구 방법을 사용했고, 틀린 사실을 수용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기존의 이론들은 사회의 방향을 이끌어왔다. 모노는 사회의 방향을 재정립해야겠다고 느꼈을 것이다. ‘왜 인간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현재의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사고 체계는 서서히 스며들어 공고해지기 때문에 아무리 객관성의 공리를 외쳐도 이번 세대에서는 거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시각각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논쟁이 인간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동기는 충분하다. 목적은 ‘나와 다른 ‘나’들의 행복을 위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모노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 우연과 필연
모노는 우연과 필연에 기초하여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 모노가 파악한 우연은 ‘본질적인 불확정성’을 띤다. 예를 들어, 폴리뉴클레오티드 연쇄의 생성은 자발적 결합의 산물이다. 비능률적인 수많은 시도가 있었고, 실패도 많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합이 단 한 번 성공하기만 하면, 더 이상 실패와 비능률적인 시도는 없다. 그 결합이 언제 완성되고, 누가 결합을 지시했는지 우리는 얘기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됐을 뿐이다. 하나의 dna는 수많은 시도 끝에 맞는 짝을 찾았을 뿐이다.
어떤 결과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우리는 사건의 최초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생물학의 원리에 따르면, 최초 원인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최종 결과는 얻어걸리고, 얻어걸리고, 얻어걸린 것이기 때문이다. 진화를 가능케 한 미시적 요란도 우연의 산물이다. 미시적 요란은 생명체의 합목적적인 기능, 즉 최종 결과에는 무심하다. 돌연변이는 매번 발생하지만 그 방향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인간과 개미가 등장했을 뿐이다.
모노가 파악한 필연은 생물학적 법칙에 의거한다. 바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안정성이다. 복제 시스템은 폐쇄적이라 미시적 요란을 선택하거나 거부하지 못한다. 그 결과 미시적 요란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합목적적인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변화의 결과는 자연선택에 의해 도태되거나 유지된다. 종의 보존과 증식에 알맞은 기능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사라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특정한 방향성을 볼 수 있다. 덕분에 우리는 ‘왜 인류가 직립보행에서 4족 보행으로 회귀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두루뭉술한 답을 할 수 있다. ‘직립보행이 더 나은 자연선택’이기 때문이었다.
모노는 언어의 사용으로 상징적 의사소통을 잘하는 개체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선택압이 창조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언어의 사용은 우연적인 사건이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나’가 죽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 상황은 합목적성이 충족되지 않는 경우에 해당했다. 언어는 발전해야만 했다. 우연이었던 언어 사용. 하지만 언어의 발전은 필연이었다.
모노는 우연과 필연의 연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일단 한 번 DNA 구조에 새겨지고 난 다음에는, 우연적인 사건들은 충실하게 복제되고 번역될 것이다. 즉 증식되고 전파돼 수천만의 동일한 복제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순전한 우연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필연의 세계로, 가차 없는 확실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것은 거시적인 차원, 즉 유기체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모노의 인간 설명은 생물학적 법칙에 근거하고 있다. 모노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을 과학에서 찾았다. 그리고 객관성의 공리를 바탕으로 과학적 사고체계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모노는 기존 사고체계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인간중심주의 박살내기
인간중심주의가 인간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모노의 주장은 힘을 얻기는커녕 드러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인간중심주의에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기에 모노는 객관성의 공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할까? 생기론과 물활론 비판을 살펴보자.
형이상학적 생기론의 대표주자는 베르그송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생명에 대한 모든 분석적‧지성적 논의를 해서는 안 되고, 생명의 해석은 직관에 의존해야 한다. 반면 과학적 생기론은 생명체의 특성이 물리적 힘과 화학적 상호작용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생명계에는 물리학 이외의 원리들이 작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배’의 발생 과정을 현재로서는 유전학적, 생화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 생명계에만 적용되는 다른 원리를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기론은 객관성의 공리를 무시한다. 형이상학적 생기론은 분석적 논의를 거부하므로 과학적 방법의 개입을 차단한다. 과학적 생기론은 생명계에만 적용되는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객관성의 공리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준다. 하지만 객관성의 공리에 따르면, 생물학과 물리학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다. 물리학의 사실은 생명계에도 적용돼야 한다. 과학의 의무는 취사선택이 아니라 모순처럼 보이는 두 가지 공리 간의 충돌을 해결하는 것이다.
물활론은 보편적인 합목적적 원리가 생명계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스펜서의 주장을 살펴보자. 스펜서는 인간의 진화가 생명계 진화의 연장이며, 생명계의 진화가 우주 전체 진화의 일부라고 설명한다. 과학주의적 진보론은 인간을 진화가 도달한 최고의 정점으로 상정한다. 우주는 처음부터 인간을 최종적 완성으로 진화했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가 ‘필연적’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객관성의 공리에 따르면, 인류의 출현이나 개미의 출현이나 다를 바가 없다. 우연한 자발적 배열과 선택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적 특징을 혐오할 이유도 없다. 인간은 동물적인 유산을 받은 개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우주의 중심일 어떤 이유도 없다. 생기론과 물활론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객관성의 공리를 포기하고 있고, 과학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과학을 이용하려고만 하므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생기론과 물활론에 객관성의 공리가 없다는 사실보다 더욱 모노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것은 현대인이 겪는 영혼의 질환이다. 객관성의 공리에 기초한 과학으로 사회는 발전하는데, 객관성의 공리를 무시하는 사고체계를 고수하는 상황이 영혼의 질환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떻게 발전하고 있냐?”라는 질문을 할 때, 과학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데 정작 자신은 ‘과학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노는 영혼의 질환을 없애는 방법으로 객관성의 공리 수용을 주장한다. 객관성의 공리는 불안을 가중시킬 테지만, 장기적으로는 객관성의 공리에 기초하여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객관성의 공리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식의 윤리다. 지식의 윤리는 객관성의 공리를 참된 지식의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누군가는 이 명제에 가치가 개입돼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지식의 윤리 자체가 객관성을 띠지 않는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윤리를 기반으로 삼은 사회가 ‘객관성의 공리’에 따랐다고 말할 수 있느냐?”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의 윤리는 근본 명제일 뿐이다. 우리는 의도를 배제하는 방법, 즉 ‘과학을 하는’ 방법을 안다. 과학은 객관성을 버리지 않고, 사회도 객관성에 의거해 조직된다.
모노는 객관성의 공리에 기초해 인간을 정의해야 한다는 ‘지식의 윤리’를 바탕으로 기존의 사고체계와 이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식의 윤리가 바탕이 된 사회는 사회주의의 확실한 기반이 되고, 사람들의 원대한 꿈을 이뤄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모노는 지식의 윤리에 기초한 사회주의의 체계나 특징 등을 전혀 말하지 않으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도대체 모노가 정의한 지식의 윤리와 사회주의의 접점은 무엇인가?
모노가 말한 사회주의는 무엇일까?
사회주의는 개개인의 자유 보장보다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중요시 여기는 관점이다.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개개인의 자유를 우선시 여긴다. 이 관점은 자유주의를 기초로 삼는다. 문제는 자유주의 사회의 도덕적 기초가 유대-기독교적 종교성이라는 것이다. 생물학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행동의 가치를 판단할 때는 종교가 개입된다. 종교는 객관성의 공리에 의존하지 않는다. 도덕적 기초도 객관성의 공리를 반영해야 하므로 자유주의는 적절하지 않은 체제다.
마르크스주의(물활론)는 면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 모노의 사회주의부터 정의 내려 보자.
객관성의 공리에 기초한다면, 인간과 동물 간의 계급, 흑인과 백인 간의 계급이 나눠질 이유가 없다. 모두가 우연적인 개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화적으로 뛰어난 개체는 피부 색깔로 결정되지 않는다. 호모 사피엔스 간의 생물학적 체계는 크게 다르지 않다. 몽테스키외의 노예관은 당대의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변에 불과했던 것이다. 객관성의 공리를 해석하면, 모든 개체 간에 계급이 나눠질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당연히 경제적인 계급도 이해될 수 없는 체제가 된다.
지식의 윤리가 사회주의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궁극적 이상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함께 계급 대립의 존립 조건과 계급 그 자체를 폐지하고 종국적으로 자기 자신의 계급지배도 철폐한다. 이렇게 해서 “각자가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사회주의의 꿈은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통치에 따른 사람들의 획일화가 아니었다.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이 꿈은 ‘신중하게 길러지고 양육된, 순수하고 공평무사한 이타주의’에 가깝다.
모노 사회주의의 특성을 생각해보는데 피터 싱어의『다윈주의 좌파』가 훌륭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피터 싱어는『다윈주의 좌파』에서 인간의 생물적 본성을 기반으로 삼는 새로운 사상, 즉 다윈주의 좌파 사상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피터 싱어는 몇 가지 지침을 제안한다.
기본지침
1. 인간의 본성을 부정해서도, 원래 선한 것이라고 주장해서도, 인간의 본성이 무한히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2. 또한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분쟁이 언젠가는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3. 모든 불평등이 사회적 조건들로부터만 기인한 것이라고 가정해서도 안 된다.
실천지침
1. 정책을 제시할 때에는 그 정책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제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 어떤 것이 자연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는 식의 추론을 거부해야 한다.
…
4. 경쟁보다는 협조를 촉진하고, 경쟁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향해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5.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동물들의 도덕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6. 약자, 빈자,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섬으로써 좌파가 가졌던 전통적 가치를 옹호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사회, 경제적 변화가 이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곰곰이 연구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도 똑같은 꿈을 꿨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택한 방법은 꿈을 실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철폐를 주장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국가엔 엄연히 계급이 존재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가 무르익은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견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는 객관성의 공리를 무시한 채 만들어진 유토피아였다. 결국 90년대 초,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붕괴했다.
모노가 주장한 사회주의는 성공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의 실패를 경험했고, 자유주의는 객관성의 공리에 따르지 않은 이론을 삼고 있으니 모노의 주장이 옳을까? 모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모노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말이 쉽다. 지식의 윤리를 갖춘 참된 지식은 가치에 무심하다. 하지만 참된 지식을 행동으로 옮기려 할 때는 가치 판단을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객관성의 공리에 기초하더라도 체제와 가치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예를 들어, 객관성의 공리에 따라 체제를 논의한다고 치자. 이기심과 경쟁 심리는 인간의 본성이다. 객관성의 공리에 따르면 이 특성을 받아들여 사회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문제는 이기심이 사회주의와 어울리는 경제체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의 공적 소유나 사적 유물론을 전제하고 있지 않음에 주의하기 바란다.) 객관성의 공리는 사회주의 사상이 옳다고, 자본주의 사상이 옳다고도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주의 사상에는 어울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회주의는 이기심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객관성의 공리가 무시되는데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체제를 선택해야 하는가?
방법은 존재한다. 객관성의 공리에 의거한 체제를 생각해내면 된다. 경제학자 노스의 주장을 살펴보자. 노스는 모든 제도가 경제적 인센티브를 늘리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경제성장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효율적인 제도는 사적 수익률과 사회적 수익률을 일치시켜 경제 성장을 이끈다. 예를 들어 특허는 발명의 인센티브를 보장해주면서 기술발전을 이끌기 때문에 효율적인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노스는 효율적인 제도를 위해서는 재산권의 보호와 규제가 확실해야 한다는 점도 덧붙였다. 노스는 이기심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기심이 공동의 이익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방법으로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체제라면 사회주의와 이기심, 경쟁심이 공존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모노가 말한 사회주의는 실현될 수 있을까. 당분간은 모노의 사회주의가 실현되기 어렵다고 본다. 도킨스의 이타주의는 너무나도 원대한 꿈이고, 그보다 현실적이라는 피터싱어의 지침을 실현한 사회도 보지 못했다.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주류가 아니다. 피터 싱어의 기본 지침을 기반으로 삼은 정당은 한국에 없다. 지침과 관련된 사건들이 정치에서 무수하게 논의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연과 필연』에서 모노는 자신만만하게 논지를 펼쳐가지만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에는 의문을 표시한다. 실현된 적도 없고, 실현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책이 쓰이고 20년 뒤,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고, 사회주의의 꿈은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모노의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주의와 다르다고 주장해도 ‘사회주의’라는 단어와 ‘공동의 이익’이라는 원리 자체만으로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이다. 원래 실현 가능성이 낮은 이론이었지만, 이제는 그 꿈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드물어졌다.
하지만 객관성의 공리를 사고체계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 모노도『우연과 필연』에서 자신의 주장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물학의 법칙을 떠올려 보면, 계란이라는 오류가 바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법이다.『우연과 필연』이 쓰인 지 약 5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더욱 과학기술의 발전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과학적 사고체계는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동성애를 거부하고, 인종을 차별한다.
하지만 새로운 생각이 등장하고 있다. 젠더를 예로 들어보자. 여자는 유전적으로 열등해서 참정권을 가질 수 없고, 대법관도 될 수 없다고 말하던 시절은 끝났다. 객관성의 공리가 인간을 이해하는 관점을 바꾸고, 사회의 방향을 이끌어 온 것이다. 지금 전 세계에선 물활론과 이별하고, 과학적 사고체계를 토대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 흘러 (얼마나 흐를지는 몰라도) 과학적 사고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체제가 종교나 물활론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간의 불안을 충분히 해소해주는 정도에 도달한다면,『우연과 필연』이 성서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는 정말 모노의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논의를 정리해보자. 모노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세우기 위함이다. 모노가 ‘제대로’ 이해한 인간은 객관성의 공리를 따른다. ‘객관성의 공리를 따르자!’는 합의는 지식의 윤리고, 모노는 지식의 윤리만이 사회주의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식의 윤리는 인간중심주의에 점철된 물활론과 생기론과 차이가 있다. 모노의 사회주의와 같은 꿈을 꾸었던 물활론은 객관성의 공리에 의거하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모노의 사회주의는 계급이 사라지고, 모두가 상생하는 특징을 띠며 객관성의 공리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피터 싱어의 『다윈주의 선언』은 그런 사회의 특징을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객관성의 공리를 받아들여도 논쟁은 여전히 지속될 것이다. 인간 본성의 다양한 특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다양한 체제가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스와 피터 싱어의 아이디어에서 보았듯, 서로 다른 객관성의 공리가 양립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나간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원대한 꿈인 ‘양육된 이타주의’를 기반으로 삼은 사회는 없었고, 피터 싱어 역시 현재로서 이 꿈은 너무 이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으로 한 번 실패한 적이 있어 대중들의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현재는 모노의 사회주의가 정착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연과 필연에서 모노가 주장한 객관성의 공리는 서서히 사고체계에 퍼지고 있고, 인간을 이해하는 관점을 바꾸고 있다. 그래서 ‘과학적 사고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현실 체제가 발전한다면, 모노의 사회주의가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과학의 수혜자이면서 과학을 모르고 있었다. 객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인문학과 경제학만 찾았다. 전문지식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여전히『우연과 필연』의 과학적 사실을 모두 파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과학의 수혜자이면서 과학을 모르는 너네들, 알고 얘기하자.”라는 모노의 생각을 탐구하며 기존의 생각이 변했고, 생각이 일치하는 분야에선 논리적 근거를 갖출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과학적 사고체계를 깊게 이해한 것이 큰 수확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이 생각난다. 제대로 알아야, 지금의 나, 미래의 나와 사회를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 글은 2018년 2학기 자연과학고전읽기 수업에 제출했던 에세이입니다.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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