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마신 막걸리에 완전히 취한 나는 알 수 없는 열기에 빨갛게 달아올라 밤이 이슥하도록 마구 떠들어댔다. 대자보처럼 내 몸 안에 검고 붉은 자음과 모음이 가득한 것 같았다.」 「76이야. 그가 말했어. 뭐라고요? 내가 물었지. 이렇게 서늘한 밤은 76이라고. 그가 다시 말했어.」 「“인구를 늘리는 것으로 조국에 보답하겠습니다.”」 「아저씨는 'PS'가 빠진 영문 편지는 디저트가 빠진 돈가스와 같다고 말한 뒤, 편지 맨 아래에다가 ‘PS’와 ‘12월 15일 이후에 회신할 곳’이라며 서울 외곽에 있는 베드로의 집 주소를 적었다.」 「그러므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연수의 장편이다. 예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원더보이>에 대해서 ‘성장 소설이다’라는 평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어서 청소년들을 위해서 되게 전형적인 주제로 전형적으로 쓴 소설인 줄 알고 굳이 읽지 않았었는데, 오늘 시험 이틀 전이라 학생들을 자습시키면서 다 읽고 나니 진작 읽어볼 걸 하고 굉장히 후회됐다. 사실 단편을 더 선호하는 편이라 장편을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장편 소설 중에 가장 좋았다. 아, 그리고 작년에 읽었던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보다 이게 더 좋았다. 소설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성장’이다. 그 성장은 주인공 ‘정훈’ 내면의 성장이기도 하고, 사회의 성장이기도 하다. 유신 정권과 군사 독재가 지도자만 바뀌었을 뿐 줄기차게 이어지는 사회 속에서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어버린 정훈은 ‘권 대령’에 의해 간첩을 잡은 아버지의 아들인 영웅, 즉 ‘원더 보이’로 포장된다. ‘권 대령’은 모르고 한 말이었지만, 정훈은 실제로 사고 후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을 수 있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진짜 ‘원더 보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능력이 처음 쓰이는 곳은 고문실이다. 결국 재능개발연구소를 탈출한 그는 사회에서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일들을 겪으며 성장하게 된다. 결국 신체와 정신이 조금씩 성장해 가면서 그는 그 능력을 점차 잃어버리지만 오히려 그것은 축복으로 보인다. ‘재진 아저씨’의 말처럼, ‘능력’은 사실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는 별로 도움되지 않으니까. 전술했던 성장 과정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과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도 등장했었던 ‘가족(혹은 가족의 흔적) 찾기’이다. 여기서 잘 짜인 구성과 깊은 사유를 거친 기막힌 문장력을 통해서, 정훈이 어머니의 흔적을 탐색하는 과정이 뻔한 신파가 되지 않게 만드는 힘, 전경으로 드러나지 않고 배경에서 부드럽게 우러나는 70년대와 80년대 독재 정권에 대한 슬픔과 비판을 통해 이 소설이 단순하고 촌스러운 사회 비판 소설이 되지 않게 만드는 힘, 그리고 소설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초능력’이라는 소재 때문에 이 소설이 양산형 장르 소설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힘이 바로 김연수에게는 있다. P.S. 표현과 발상이 가장 좋았던 구절은 위쪽에 적어둔 “이렇게 서늘한 밤은 76이라고.”라는 ‘이수형’의 말이었다. 그리고 이수형이 원주율 아래 무한한 숫자를 각 초성의 단어와 이미지로 기억하는 부분은 정말 너무 아름답고 감탄할 만한 표현과 발상이어서 그 부분의 전문을 옮기고 싶었지만 원주율 아래 100자리를 하나의 시처럼 만든 그 모든 것을 옮기는 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 부분은 비단 소설뿐만이 아니라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창작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표현만 놓고 봐서 가장 좋았던 구절은 역시 위쪽에 적어둔 “인구를 늘리는 것으로 조국에 보답하겠습니다.”라는 정훈의 말이었다. 풍자는 역시 이런 위트 섞인 은은한 풍자가 좋다. P.S.2 문학적 감상과 별개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역시나 또 위에 적어둔 ‘PS가 빠진 편지는 편지가 아니다’라는 요지의 ‘재진 아저씨’의 말이었다. 몇 년 전 내가 받았던 편지 말미에 적힌 PS에 똑같이 적혀 있던 말이라 순간 찌르르 하고 가슴을 관통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 날은 몇 안 되는, 내가 ‘완벽하게’ 기억하는 순간 중의 하나다. 그 편지를 건네 받고, 건네준 사람의 눈 앞에서 하나하나 읽어나갈 때의 기분, 공기와 날씨, 구름의 모양, 내 옷차림, 심지어 근처에 내려앉던 갈매기의 깃털 하나하나까지도. 그러고 보니 그 이후로 나도 편지를 쓸 때는 항상 PS를 넣어서 쓴다. 편지를 안 써본 지도 몇 년이 되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