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정원과 문화 감상문
글로벌리더학부 2016310566 이주은
나에게 정원은 마당 있는
집만이 누릴 수 있는 집속의 자연이었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중학교 2학년, 학교 도서관에서 학생 사서활동을 하다가 『타샤튜더 나의 정원』을 읽고 나서 다소 흔들리게 되었다. 부자들만 정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왔었는데 큰 재산 없이도 타샤 튜더는 정원을 꾸리고 살았다. 손수 정원을 가꾸고 심지어는 텃밭까지 일구어 자급자족하여 살아가던 이분의 삶은 나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막연하게만 생각해오던
정원에 대한 생각이 최근 두 번의 계기로 인하여 또 다시 변화하였는데, 그 첫번째 계기는 유럽여행이었다. 작년 여름 유럽여행을 하면서 일상 속에 자리잡은 정원의 문화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퇴근 후에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고 보주광장, 뤽상부르 정원에 나와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도시 속 작은 녹음이 가지는 의미가 상당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선
정원에서 발전한 도심 한가운데의 공원도 잘 없을 뿐더러 사람들도 잘 찾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유럽인들의 휴식이 더욱 남달라보였다. 공중의 정원이 당연하고 일상적인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두번째 계기는 정원 수업을 들으며 『유럽, 정원을 거닐다』
를 읽고 나서였다. 건물과 달리 정원에는 별다른 양식이 없고, 그저
시대에 따라 정원을 구성하는 식물과 조각상들만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째서 그러한 선입견이 있었는지를
의심하게 할 만큼 정원의 역사는 길었고 내가 알아야 할 정보들도 많았다. 건축의 양식이 변화함에 따라
정원의 양식도 변화하였다. 역사의 흐름 안에서 그 어느 하나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 책은 국가별로 정원을 소개하고 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과 독일의 정원들이 양식과 시대, 지역색을 더하여 소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정원을 소개하는
부분이 직접 여행했던 곳이라 그런지 가장 와닿았었다. 엄마와 함께 낯선 파리를 헤매던 중 생소한 지도를
참고해 무작정 들어간 뤽상부르 정원이 (처음에는 뤽상부르 정원인줄도 몰랐다) 지금으로부터 사백여년 전에 처음 공원으로 조성되어 상원 건물로도 쓰이다가 근대에 와서야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시민들이 유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뤽상부르 정원과 같이 대부분의 정원은 왕이나 부자와 같은 권위자에 의해 아름답게 조성되지만 그
아름다움을 나누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러한 점에서 정원은 부자가 누리는 아름다움이면서 점차
일반으로 퍼져나갈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정원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잘 드러난다. 상수시 정원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만들어냈고, 빌라 아드리아나 와 빌라 마다마의 경우에도 각각 교황과 줄리오 메디치가
조성했던 것 처럼 말이다. 처음 만들어 낼 때에는 큰 돈과 부지가 필요하며 감각있는 정원사의 도움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의 가치는 가진자의 것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고로 그 정원에서 뛰어놀
수 있는 아이들도 그닥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일반 대중이 정원의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는 시대가 오면서, 결과적으로 정원의 아름다움은 여럿이 음미할 수 있는 것이 되었고 정원이 가지는
가치의 소중함은 공유를 통해 더 커졌을 터이다.
어느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의 대중이 정원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는 것은 굉장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정원이 국가 문화의
모음과 다름 없다는 표현이다. 문화의 지평이 넓어짐에 따라 문화로 일컫을 수 있는 분야가 비단 의식주에서
다변화되고, 결국 역사적 상황과 시대의 감각을 담은 정원이 만들어 지는 것이라는 해석이 되었다. 정원 문화를 가치있게 여겨왔던 유럽인들의 전통이 다수 대중에게까지 하나의 관습으로 내려저 온 것이 아닐까. 결국 정원을 소중히 여기는 유럽인들의 마음도, 쉼과 여유를 문화로서
향유한다는, 일종의 문화적 자부심이 아니었을까?
꽃말 외우기, 나무말 외우기, 수목원 방문하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내가 더 이상 별종이 아닌 사회에 산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여유도 하나의 사회적 자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돌아보면 정원의
함의가 참으로 크다. 가히 문화의 모음이라 부를 만 하다.
물론 정원만이 문화의 모음인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럼에도
우리 나라에도 정원 문화라고 부를 만한,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또는 양식이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학교 근처에 창덕궁 비원이 있는데, 봄이 오면 꼭 방문해 도슨트의
설명을 들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평소 식물과 정적인 분위기를 즐긴다고 자부하던 내 자신이 학교 바로
옆의 비원도 못 가보고 일상속에 바쁘게 파묻혀서만 살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되었다.
여유라는 것이 굳이 찾아야만 찾아지는 것이 아닌 사회, 일반 시민들 마음 한켠에 쉬어갈 수 있는 정원이 있는 사회는 어떻게 성취되는 것일까. 간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쉼과 여유를 일상적이고 당연한것으로 여기고
싶다면, 도시 곳곳에 정원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
세종시에 가 계신 법무처 과장님의 경험에 따르면, 옥상에 마련된 정원이 휴식에 많은 도움이 되셨다고
한다. 나의 경우에도 인문관 7층의 원곡정원과 수선관 3, 5층의 정원을 자주 이용하고는 했는데, 현재의 복잡함을 해소시켜주는
공간이 되고는 했었다. 이처럼 거창한 것이 아닌, 일상적
공간에서 잠시 쉬어가는 녹음이 마련되어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여유로 다가온다. 미래의 공직자를 꿈꾸는
법학도로서 정원, 그리고 쉼과 여유의 가치에 대해 되짚어 보는 좋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