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과거와 미래를 거닐다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에 태어나서일까, 난 유독 식물을 좋아하던 꼬마였다. 어린 시절에는 종종, 학교 뒷마당 그늘진 곳의 축축한 흙을 파내어 내 화분에 몰래 옮겨 담고는 문방구에서 사온 씨앗들을 심어 키우곤 했는데, 나는 강낭콩의, 나팔꽃의, 혹은 봉숭아꽃의 씨가 담긴 화분에 매일 물을 주며 하루에 몇 분이고 거실 창가에 누워 베란다에 늘어선 나의 작은 화단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가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 결실을 맺은 기특한 식물들을 볼 때면 남몰래 ‘예쁘다, 예쁘다’ 속삭이며 부러 뿌듯한 미소를 지어보이곤 했던 것이다. 조금 더 머리가 커져서는 부모님 뒤를 졸졸 쫒아 다니며 산으로 들로, 온 동네의 공원으로 돌아다니며 언젠간 나만의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겠노라 꿈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러다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좋다던 식물은 나 몰라라 뒷전으로 두고 공부에만 열중하다가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 큰 성인이 되어 빌딩숲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던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를 깨닫고 ‘세계의 정원과 문화’라는 수업을 선택한 나로서는 ‘유럽, 정원을 거닐다’라는 이 책이 더욱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겨울방학에 맞춰 몇몇 유럽 국가를 여행하고자 계획을 세우려던 찰나였으니, ‘유럽을 여행하면서 만나는 정원’을 주제로 삼고 있는 이 책을 펼치는 일에 어떻게 망설임이 있었겠는가?
주고받는 편안한 대화체로 사진과 함께 작자들의 정원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풀어나가는 형식의 이 책은 이탈리아의 정원 이야기로 책의 포문을 연다. 본래 나는 이탈리아라고 하면 물의 도시 베네치아와 로마와 같이 여행지로 유명한 도시와 그 흐릿한 이미지만 몇몇 떠올랐을 뿐, 정작 그 도시의 역사나 구조, 속사정과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 책은 정원과 도시를 엮어 설명해주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정원에 대한 단순사실 이상의 풍부한 배경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로마가 고리대금의 도시라는 점은 특히 놀라웠다). 책에는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양한 정원들이 소개되어있었지만, 나는 이탈리아의 정원들이 대체적으로 차곡차곡 쌓인 역사의 흔적을 거의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장소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거의 폐허처럼 보일 거라는 빌라 아드리아나가 그러했다. 유구나 유지가 남아 어쩐지 황폐하고 공허해 보이는 그곳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 더 생각하고 해석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빌라 아드리아나는 정원이라고 하면 푸릇푸릇한 자연으로 둘러싸인 쉼터라고만 생각하던 내게는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깨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나는 더 다양한 정원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다음 파트로 책장을 넘겼다.
프랑스는 내가 가장 먼저 여행하고픈 곳으로 선정한 국가인 만큼 크게 발달한 예술, 역사를 품고 있으며 이는 정원이라는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였다. 조경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베르사유 정원의 아름다움을 알고 찾아간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흥미롭게 여기고, 가고 싶은 프랑스의 정원을 한 가지만 꼽으라면 선택하고 싶은 정원은 바로 ‘모네의 정원’이다. 일단 내게 화가로 익숙한 모네의 이름이 반갑기도 했고, 그가 남긴 그림 속의 실제 모델이 된 그곳의 풍광을 직접 관람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네 정원은 파리 북서쪽 노르망디 지베르니에 위치하고 있는데, 파리에서부터 4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다가 현대의 감각적 아름다움과 낭만을 가지고 있어 자연과 소담한 멋을 선호하는 나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다. 파리의 중심에 위치한 튈르리 공원에 가는 것도 무척 멋질 것이다. 파리 곳곳을 관람하다가 튈르리에 들러 산책을 하고 루브르 박물관도 관람하며 휴식을 취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하루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신사의 나라, 해가지지 않는 나라 등으로 불리는 영국은 풍경식 정원의 백미를 경험할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풍경식 정원이란 18세기 영국에서 그 이전까지의 직선적, 건축적인 정형식 정원에 반동하여 정원 그대로의 자연에 순응하는 자연식 조경을 의미하는데, 영국인들이 이 풍경식 정원에 시골식 코티지 정원을 주류로 가져오면서 ‘정원 가꾸기’가 그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게 되었다고 한다. 짦게 언급되었지만, 나는 영국의 풍경식 정원들 중에서도 스투어헤드 정원에 큰 흥미를 느꼈는데, 그곳이 바로 영화 ‘오만과 편견’의 촬영지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와 책 모두 어릴 때 봤기 때문에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를 다시 한 번 본다면, 영화 속의 정취를 직접 체험하며 그 낭만적인 분위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영국의 오랜 귀족문화, 권력과 부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소이며 영국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대해 갖고 있던 열등감을 풍경식 정원으로 어떻게 극복해냈는지를 알 수 있는 장소이다. 또한 정원의 정취는 평화로운 정서를 간직하고 있으니 충분히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은 독일의 역사 정원과 현대 정원들의 소개로 채워져 있었는데, 독일이라는 국가는 어쩐지 내 안에서 조금 냉정하고 칼 같은, 절도 있는 이미지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듯 정원이란 몽글몽글 평화롭고 생기 있는 장소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던 내게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기하학적 모양과 아기자기함이 눈에 띄는 헤렌하우젠의 정원의 사진을 펼쳐 보는 순간 그러한 이질감은 완전히 잊히고 나팔꽃의 봉우리를 지켜보던 어린 시절의 설렘으로 독일에는 또 어떤 아름다운 정원들이 있을지 기대하며 다시금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독일적인’ 정원이라는 파우엔인젤은 또 어찌 그리 신비롭던지. 이름마저 ‘공작섬’ 이라는 뜻을 가진 그곳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집권기에 풀어놓았던 공작이 아직도 살고 있으며 아름다운 풍광과 자연경관을 간직한 채 하펠 강 위에 자리하며 배를 타고 들어오는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여러 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것을 독일만의 색채로 소화해내는 정원사들의 손길로 무뚝뚝하지만 성실한 독일인들과 같이 무심한 아름다움을 가진 하펠 강의 진주. 그곳에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곱씹는 추억은 또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만으로도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며 나는 이리저리 펼쳐 나가던 생각의 장 역시 함께 조심스레 접어두었다. 나는 내가 책을 통해 오로지 정원에 대한 지식만을 습득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난 정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오래된 앨범을 다시 들추기도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하면서 추억에 잠기고 앞으로의 즐거움을 기대하며 웃음 지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의 나를 만나고 왔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내게 잊고 있던 꿈을 상기하게 하고 막막하던 얼마 후의 계획에 빛을 밝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나는 과거의 내가 기대했던, 또 미래의 내가 즐거워할 새로운 시도를 계획해 보려고 한다. 조그맣더라도 나의 정원을 가꾸는 일이나,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